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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유다 이스카리옷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14 조회수14,029 추천수0

[신약 성경의 인물] 유다 이스카리옷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마르 14,21).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재정을 담당할 정도로 인정받았으나(요한 12,6; 13,29 참조), 배신과 배반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 바로 유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성, 이스카리옷

 

먼저, 그의 성과 관련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봅니다. 요한 복음은 유다를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6,71; 13,2.26)라고 언급합니다. 곧 그의 성이 ‘이스카리옷’인 것이지요.

 

히브리어로 이스카리옷은 ‘카리옷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는 출신 지역을 말합니다. ‘하초르’라고도 불리는 남유다 지역의 ‘크리욧’(여호 15,25 참조)이 바로 이곳입니다. 크리욧은 헤브론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대부분이 갈릴래아 출신인데 반해, 유다는 유다 지역 출신의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성에 대한 또 다른 내용은 그리스어 ‘시카리오스’(σικαριοϛ) 와의 연관성입니다. ‘자객’(사도 21,38 참조)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당시 로마의 통치에 맞서 무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무리를 지칭합니다. 이는 ‘열혈 당원’을 떠올리게 합니다. 자객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열혈 당원이기 때문이죠.

 

이 자객의 활동은 주로 테러의 형태를 띱니다. 그 주요 대상이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 계급이라기보다는 유다 민족 가운데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며 자신의 이권을 취했던 이들에 대한 폭력적 응징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사도들을 설명할 때 ‘열혈 당원’인 시몬 다음으로 유다가 소개(마르 3,19; 루카 6,16; 마태 10,4 참조)되고 있는 것은 이 배경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돈과 유다

 

복음에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에 앞서 베타니아의 여인 이야기를 먼저 다루며 그가 어떤 자인지 알립니다.

 

어떤 여인이 매우 값진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자, 몇몇 제자들이 이를 불쾌해 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넘을 향유를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는데, 그 비싼 향유를 허투루 쓰고 있다고 생각하여 이 여인을 나무라기까지 합니다(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 참조).

 

요한 복음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이 여인의 이름을 베타니아의 ‘마리아’라고 언급하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인물이 유다 이스카리옷이라고 콕 집어 그의 이름을 밝힙니다(12,3-4 참조).

 

나아가 유다의 정체와 그의 나쁜 행태도 드러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12,6).

 

하지만 유다가 돈밖에 모르는 도둑이었을까요?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방도를 수석 사제들과 함께 의논한 뒤 은돈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합니다(마태 26,14-16; 마르 14,10-11; 루카 22,3-6 참조). 하지만 은돈 서른 닢은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대가라고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액수입니다.

 

그 당시 이 액수는 노예 한 명 값에 해당하는 금액(탈출 21,32 참조)입니다. 은전한 닢은 보통 네 데나리온이었지요. 그렇게 보면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준 대가로 백이십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었으니 넉 달 치 품삯에 해당하는 돈 자체가 분명 적은 돈은 아니지만, 과연 유다가 노예 한 명의 몸값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속뜻

 

마리아가 가지고 왔던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의 가치만 해도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당시 열 달 치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발을 닦는 데 사용했던 것이지요.

 

니코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려고 백 리트라에 해당하는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요한 19,39 참조), 제자 공동체의 재정이 그렇게 궁핍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유다가 큰 금액이건 적은 금액이건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으는 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던 유다가 은돈 서른 닢만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팔아넘겼다는 말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루카 복음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알리고(22,3 참조), 요한 복음은 악마가 이미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고 전합니다(13,2 참조).

 

그가 ‘열혈 당원이고, 자객이어서 그랬다.’라는 주장이 조금 설득력이 있기는 합니다. 민족을 해방하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에게 배척받으며 스스로 죽음을 초래하는 나약한 예수님의 모습(마르 8,27-31 참조)에 배신감을 느끼고, 그런 예수님을 단죄하려는 유다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많은 학자는 당대의 메시아상과 예수님과의 차이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갈망하며 기다려 왔던 메시아는 다윗으로 대변할 수 있는 제왕적인 메시아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다시금 다윗 시대의 영화를 가져다줄 강력한 메시아를 대다수의 유다인이 자신들의 메시아로 희망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 메시아이시나 유다인들이 바라던 그 길을 가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유다 사람만이 아닌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메시아를 유다인들이 이해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죽음의 길을 자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혼란과 혼동을 가져다주었고, 어느 때부터 이해할 수 없는 스승의 설명과 행동은 당혹감마저 안겨 주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으며, 초자연적인 기적도 행하셨던 메시아, 놀라운 능력을 지니셨음에도 이런 초라한 예수님의 모습에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유다는 그분을 고발하여 단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유다는 예수님을 백성의 지도층에게 넘겨준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예수님께서 놀라운 지혜와 언변으로 그 상황에서 유유히 빠져나오시어 그가 바라던 메시아의 길을 가시리라고 확신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당신께서 메시아로 나서실 상황과 분위기가 무르익었는데, 그때가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 망설이신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나서서 밀어붙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은돈 서른 닢은 그저 형식적으로 받은 대가에 불과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유다가 어떤 까닭으로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에게 넘기려 했는지 명확히 알려 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여러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온전히 봐야 할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를 들을 수 있는 지혜에 대해 다시금 머물러 봅니다.

 

 

자책이 아닌 회개와 용서

 

유다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붙잡히셨고, 많은 이가 보는 앞에서 온갖 치욕과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유다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에 그가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나 봅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참혹한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자는 부정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꾸로 떨어져 배가 터지고 내장이 모조리 쏟아졌습니다”(1,18). 너무나도 잔인하게 묘사하는 사도행전의 설명은 유다의 최후가 실제로 그러했다기보다는 죄인의 최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유다의 최후를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받은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고백합니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27,4).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이후였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답변을 들은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욱 괴로웠을 것입니다.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27,4).

 

결국 유다는 예수님의 몸값으로 받은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는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음을 맞이합니다(마태 27,5 참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정한 베드로도 그랬고, 유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뉘우쳤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심한 자책은 자신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자책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극한의 상황으로 자신을 내몰았던 유다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회개하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시선을 외면한 채 그 크신 은총을 스스로 거부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그가 바라보고 외면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물론 유다는 큰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였다면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의인의 모습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자책이나 자기 비하가 아닌 주님의 사랑과 용서의 시선을 마음속에 새겨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그 은총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8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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