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79) 고별 담화 1(루카 22,21-30)
스승과의 최후 만찬에서 권력 다툼 벌이는 제자들 루카 복음사가는 최후 만찬에 이어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길게 전합니다. 학자들은 이를 고별 담화(22,21-38)라고 부릅니다. 이번 호부터 두 번에 걸쳐 이 고별 담화를 살펴봅니다. 제자의 배반 예고(22,21-23) 최후 만찬에서 새 계약의 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은 바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제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당신과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배반자가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식탁은 원래 친교의 자리입니다. 더욱이 이 최후 만찬 식탁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제자들을 위해 당신 친히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말 그대로 한 식구(食口)가 모인 자리입니다. 그 식구 가운데 배반자가 있는 것입니다. 배반자임을 아시면서도 한 식구로서 식탁에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22,22) ‘사람의 아들은 정해진 대로 간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로 가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9,22; 9,44; 18,31-33) 그 예고가 이제 실제로 이뤄지려 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수난과 죽음의 길이 하느님의 뜻이라 해도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반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배반자는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사로 예수님을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 불행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로운 행위로 자초한 것입니다. ‘불행하여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만찬장은 한순간 술렁였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렇게 물었다고 보도합니다.(마태 26,22; 마르 14,19) 하지만 루카 복음사가는 “그러한 짓을 저지를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서로 묻기 시작하였다”(22,23)고 기록합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22,24-27) 누가 배반자일까 하는 것과 관련해 식탁은 한동안 소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귓속말이나 수군거림이 만찬 자리를 지배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제자들은 이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를 놓고 말다툼을 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세가들은 자신을 은인으로 부르게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22,26) 사도들은 아마 예수님에게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을 것입니다.(마태 23,11; 마르 10,43; 루카 9,48 참조) 그렇지만 말은 쉽지만 행동은 쉽지 않음을 루카 복음사가는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이 자리 다툼하는 이야기를 전하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을 타이르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22,27) 이 말씀에 사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의 또 다른 말씀을 전합니다. 보상을 약속하시다(22,28-30) 보상을 약속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22,28) 실제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줄곧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고락을 같이해 왔습니다. 그랬던 만큼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리다툼을 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다툼을 하는 제자들에게 낮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타이르셨지만 제자들이 당신과 고락을 함께해 왔음을 충분히 인정하시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시련을 함께해온 제자들을 위한 보상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2,29-3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뿐 아니라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판한다는 것은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예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주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시련을 겪은 보상을 톡톡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1. 친교의 자리인 만찬의 식탁에 배반자가 함께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만찬 자리에서 그를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할까요? 나와 함께했던 사람이 나를 배반하고 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만찬을 나눌 수 있는지요? 예수님처럼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담담하게 “불행하여라…” 하고 말할 수 있을까요? 2. 제자들은 자기들 가운데 배반자가 있다는 말씀에 술렁이지만, 곧바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를 놓고 자리다툼을 벌입니다. 그것도 스승이 차려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떠할까요? 성찬의 식탁(미사)에 참여해 우리 잘못을 참회하고 정성껏 주님을 모시지만 돌아서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지는 않는지요? 3.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 다스린다는 것은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약속하시지만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다시 한 번 가르치십니다. 구원의 성사이자 표징인 교회 안에서 다스림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요? 섬김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9월 2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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