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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사랑과 열성의 요한 사도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1 조회수8,836 추천수0

[신약 성경의 인물] 사랑과 열성의 요한 사도

 

 

예수님의 애제자. 요한 사도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성경」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21,20)라고 기록되었을까요? 부러운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이 호칭이 요한 복음서에서만 언급되고 있다는 데에 살짝 미소를 짓게 됩니다.

 

요한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지간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입니다. 직업은 어부로, 배를 소유하고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던 이들입니다(마르 1,16-20 참조).

 

남부러울 것 없던 이 두 형제에게 어느 날 예수님께서 다가오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더 이상 물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쓰시겠다고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두 형제는 곧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이 두 형제의 굳은 의지와 단호한 응답에 대해서는 2월 호 ‘야고보 사도’ 편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이번 호에서는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심정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려 합니다.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태 4,21-22).

 

아버지 제베대오는 예수님께서 두 아들을 부르시는 것을 곁에서 바라봅니다. 자신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서는 두 아들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 또한 아버지 제베대오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습니다.

 

이처럼 제베대오도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강렬함을 함께 경험했기에 ‘두 아들이 떠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사가들은 이를 모두 “버려두고”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매정하게 떠나가 버리는 두 아들을 붙잡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친척들 아니 적어도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외치고 싶었을 아버지의 마음에 머물러 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요? 사실 아버지는 그 현장에라도 있었지만, 두 아들이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모두 ‘예수’라는 사람을 좇아 떠나가 버렸다는 소식은 그들의 어머니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는 당혹스러운 상황입니다. 일반적인 부모라면 당장 이 불효막심한 아들들을 붙잡아 혼을 내야할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부모에게서 두 사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도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사랑과 열성의 사도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13,23-25).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예고하셨을 때, 그자가 누구인지 베드로조차 직접 묻지 못하고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요한에게 고갯짓하여 여쭈어보게 합니다.

 

‘사랑의 사도’라는 요한 사도의 또 다른 별칭이 떠오릅니다. 이는 그의 외모가 미소년이나 귀공자 같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또 사도들 가운데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요한 사도라는 사실은 이 인상을 더 자연스럽게 형성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한편, 그의 형 야고보처럼 요한의 실제 성격도 급하고 흥분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곧바로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이런 이유 때문인지 예수님께서 특별히 두 형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의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마르 3,17 참조).

 

불같은 성격에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열성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요한 사도도 완벽하거나 뛰어난 인격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약함과 부족함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머무르며 예수님과 함께 그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누구보다도 당신을 따르려는 열성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기에 이런 요한 사도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경에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특별한 순간마다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마르 5,37; 루카 8,51 참조)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마르 9,2; 마태 17,1; 루카 9,28 참조),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마르 14,33; 마태 26,37 참조)등 공생활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는 세 제자 가운데 하나로 요한 사도가 언급됩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입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치욕적이고 잔인한 형벌입니다. 이 형을 받은 사람에게 동조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그 죄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에게 동조한 것이 발각된 이가 함께 십자가형을 받았다는 로마의 기록도 있었으니까요. 이 형벌을 받은 이와 동조자라는 것이 알려진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올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처럼 다른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 피해 있는 상황에서도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이도,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바라본 이도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6-27).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러 가장 먼저 빈 무덤에 도착했지만, 뒤따라 달려온 베드로 사도를 기다렸습니다(요한 20,3-6 참조).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오직 요한 사도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곁에 계신 이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닫도록 베드로 사도에게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하고 말합니다.

 

요한 사도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진 듯합니다. 예전의 불같은 성격이라면 분명 누구보다도 먼저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려 했을 것입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분께 달려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곁에서 보고 들은 그는 이전과는 다른 더욱 성숙한 모습의 사도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전하는 것처럼 요한은 이제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갈라 2,9)이 됩니다.

 

 

성숙해지는 그리스도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6-37).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출세와 권력을 향한 강한 욕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현세적인 메시아로 생각하고, 이제 그때가 다가옴을 느끼자 그의 형과 함께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매우 겸손하지 못한 언행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루카 22,24)는 것을 볼 때 사실 다른 제자도 두 형제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2-23).

 

“할 수 있습니다.”라는 즉각적인 응답은 두 형제가 다가올 권력에 눈이 멀었음을 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잔을 그들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그것이 현세적인 자리와 권력이라고 믿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야고보는 열두 사도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아이러니하게도 형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신 사도들이 하나둘 순교로 떠나갑니다. 정작 요한 사도는 다른 사도들처럼 순교하지 못하고 가장 오랫동안 지상에 남아 교회를 돌보았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셨기에 요한 사도가 장수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홀로 순교의 영예를 얻지 못하고 기력이 쇠하는 순간까지 교회를 돌봐야 했던 것은 요한 사도에게 맡겨진 또 하나의 사명이었음을 생각해 봅니다. 가장 나이 어린 제자가 가장 오랫동안 사도로서 길을 걸어야 했던 것이지요.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령으로 노쇠해진 요한 사도는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만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 가르칠 수도, 설득력 있는 설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요한 사도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전하려고 했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겠지요. 이렇듯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예수님을 뵙고, 따르는 길은 다양합니다. 짧지 않은 삶의 여정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알리는 요한 사도의 모습처럼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의식하고, 그분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께 나아가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9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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