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82) 잡히시다(루카 22,47-53)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의 위선적인 입맞춤 - 배반자 유다는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표식으로 삼는다. 사진은 조토 디 본도네(1267~1336) 작 ‘유다의 입맞춤’, 이탈리아 스크로로베니 성당. [CNS 자료 사진] 겟세마니에서 홀로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돌아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이들입니다. 그 대목을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시고 계실 때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라고 하는 자가 앞장서서 다가왔다….”(22,47 ㄱ-ㄴ) 예수님께서는 이미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지금 나와 함께 이 식탁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셨는데, 비로 그 유다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우선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유다가 어떻게 자리를 빠져나가 사람들을 데리고 겟세마니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루카복음이나 마태오복음 또는 마르코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예수님께서 적셔 주시는 빵을 받아든 후 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배반하기 위해 나간 줄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빵을 주시면서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뭔가를 시키신 것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3,21-30 참조) 다음으로, 유다가 데리고 나타난 무리의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루카 22,52)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만이 아니라 그 휘하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대사제의 종”(루카 22,50)도 있었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기록합니다.(요한 18,10) 마지막으로, 유다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더군다나 그때는 밤이었습니다.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그 단서를 루카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으로 물러가 묵곤 하셨는데,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에도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산으로” 가셨다고 루카는 전합니다.(루카 21,37; 22,39). 그렇다면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유다는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어디에 계실 것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겟세마니로 온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보고는 다가와 예수님께 입을 맞추려고 합니다.(22,47ㄷ) 남자들끼리 입을 맞춘다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하고 어색하게 보이지만, 중동에서는 존경의 표시로 입을 맞추는 관습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별로 이상할 게 없지요. 다른 한 편으로, 특정한 사람에게 입을 맞춘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누가 누구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어두운 밤에 유다가 누군가와 입을 맞추려 한다면 그 사람은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유다의 입맞춤은 그가 입맞춤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임을 알리는 표시인 셈입니다. 이어오는 예수님의 “유다야, 너는 입맞춤으로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느냐?”(22,48)는 말씀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실제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마태 26,48-49; 마르 14,44-45)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제자들에게는 즉시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22,36)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립니다. 루카복음에서는 그 제자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습니다만, 요한복음에는 베드로라고 나옵니다.(요한 18,10-11) 그렇다면 베드로의 이 행위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님께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22,33) 하고 당차게 응답한 대로 실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만해 두어라” 하시고는 그 사람의 귀에 손을 대 고쳐 주십니다.(22,51)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칼까지 준비하라고 하신 스승께서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당신을 잡으러 온 사람을 오히려 고쳐 주시다니….’ 당시 시몬 베드로의 머릿속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떠올랐을까요? 종의 귀를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을 잡으러 온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는 너희가 나에게 손을 뻗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다.”(22,52-5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원로)들이었습니다.(19,47-48; 20,1.19; 22,2). 그러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면서부터는 성전 경비대장들이 등장합니다.(22,4.52) 성전 경비대장들의 등장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가 됐음을 의미합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셨을 때에 예수님을 유혹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물러간 악마가 노리던 바로 그 “다음 기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너희의 때” 곧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벼르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의 “때”이자 “어둠이 권세를 떨칠 때”라고 지칭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2,25)가 지나고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을 빼앗길 때(5,35)가 온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1. 어두운 밤에 유다가 예수님께 입맞춤하려고 다가옵니다.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유다는 배반의 표시로 삼습니다. 위선적이고 가증스러운 행위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반성해 보면 우리에게는 정말로 그런 때가 없었는지요. 나의 잘못을 포장하기 위해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가식적인 행위를 한 때가 없었는지요? 그런 때가 바로 악마의 유혹에 빠졌을 때, 어둠의 권세에 지배를 받았을 때입니다. 다시는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2. 베드로가 잘라버린 대사제 종의 귀를 고쳐 주신 예수님의 행위는 배반자 유다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당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원수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앗으려 하는 이를 사랑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럴 때 우리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0월 7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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