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아벨의 제물은 굽어보시고,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을까?’ 우리 하느님의 맘을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것도 카인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더 딱한 것은 동생과 동생의 것은 기꺼이 굽어보시면서요.
참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우리가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렇게 성경을 붙들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면서 남의 의견을 눈치보고 귀동냥하구요. 그분 생각을 이토록 오래오래 하도록. 그분은 이런 것들을 참으로 많이도 하셨더군요.
천지 창조, 자신과 닮은 우리의 창조, 마리아를 통해 육화,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 승천 등. 어디 신비 아닌 게 있나요.
카인을 굽어보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분의 의지이기에, 우리는 더 고민을 해도 풀 수 없을 것으로 저는 단언합니다. 그것을 아는 순간 하느님과 같이 되는 우리를 그분은 가만 두시지 않을 터이니 개념치 마시고 맘 푹 놓으시죠. 다만 그분의 뜻인 ‘사랑’만을 생각하면서요.
문제는 두 번째 질문의 내용입니다. 하느님만이 하실 일, 아니 하신 일을 왜 우리가 아쉬워할까요. 그래 그분이 동생이라도 사랑해 주었으니 ‘참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그만인 걸, 왼 걸하며 불평만하고 화를 자초하니 자신도 우리 하느님도 그리 좋지는 않았겠죠.
이게 우리 인간의 속성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성경의 내용대로 하느님은 카인에게 질타를 하셨죠.
이런 질타를 지금도 그분은 우리에게도 수없이 하십니다. 아님 더 심하게 하죠. 카인의 후예인 우리가 아마도 그때의 카인보다 나쁘면 더 나빴지 더 좋을 리는 만무하겠죠. 우리는 이 하느님의 엄중한 경고를 항시 염두에 두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으로 우리에게 오셨을 때, 첫 설교인 ‘회개하여라!’를 상기하면서.
그러나 카인은 결국 하나밖에 없는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무참히 죽입니다.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살인마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는 결과가 어떠했을까요? 그렇지만 결국은 인간은 죄에 약한 존재입니다. 반성합니다. 늦었지만 후회합니다. 이게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래도 용서를 해 주십니다. 회개하는 살인자 카인을 결국은 용서해 주십니다.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리하여 카인은 주님 앞에서 물러 나와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아들 딸 많이많이 낳아 잘 살았다.’라고 성경은 해피엔드로 이끕니다.
두 번째 질문을 답하면서, 그분의 뜻이라 여겨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사랑해야합니다. 그분의 뜻이려니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복이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께서 이렇게까지.’라며 의심을 가지게 되면 자신도, 그리고 그분도 결국은 행복을 멀리하는 쪽으로 이끌 수 있겠죠. 그러니 항상 회개하면서, 그분 말씀만 따라가면 우리도 해피엔듭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설사 잘못해도 자비의 그분이심을 믿는 우리 아닙니까? 그분만의 의지를 굳이 알려 할 필요가 없이, 믿기만 하면 그분은 영생[永生]까지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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