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유딧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유딧 13,18) ‘예루살렘의 영예, 이스라엘의 큰 영광, 겨레의 큰 자랑’(15,9). 이처럼 놀라운 칭호를 부여받은 여인, 유딧(유다인 여인)의 모험담을 들어볼 시간입니다. 유딧기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정벌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니네베 동부지역을 정복한 아시리아 임금은 서부지역 정벌을 위해 장수 홀로페르네스를 보냅니다. 그들의 군대는 달려가 저항하는 세력을 다 파괴하고, 참혹한 그 행보 앞에서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힌’(2,28) 해안가의 도시들은 항복합니다. 이제 이 군대가 유다지역을 향해 돌아섭니다. 그간의 전황을 들어온 유다인들은 전쟁에 대비해 산성을 쌓고 군량미를 비축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으로 과연 이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미미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또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고행을 하며’(4,9) ‘힘을 다하여 주님께 부르짖습니다.’(4,15)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을 맞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길을 막아선 이 지방 사람들이 누군가 알아봅니다. 그러자 암몬인 아키오르가 나서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훑어주며 ‘그들이 죄를 짓지 않는 한 그들의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보호하신다.’(5,17.21)며 경고의 말을 꺼냅니다. 화가 난 홀로페르네스는 아키오르를 묶어 배툴리아의 성벽 아래 던져놓고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의 산악지방 배툴리아(‘처녀’)가 격전지로 선택되었습니다. 도시를 포위한 적군은 성으로 이어지는 모든 물길과 샘들을 점령합니다. 34일 동안 지속된 포위로 주민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항복이냐 아니냐? 백성들의 원성이 터져 나오고, 원로들은 ‘닷새만 더 버텨보자고, 그때까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돕지 않으신다면 항복하겠다.’(7,30-31)고 결정합니다. 그때에 아름다운 미망인 유딧이 등장합니다. 남편을 잃고 3년 4개월 동안 상을 살고 있던 부유한 여인, ‘용모가 아름답고 모습이 무척 예쁜’(8,7) 여인, 지혜와 슬기, 고운 마음씨까지 갖춘 여인(8,29),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데 있어 모범적인 여인(8,8) 유딧이 이 절망의 상황에 뛰어듭니다. “도대체 여러분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오늘 하느님을 시험하시고, 사람에 지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까?”(8,12) 유딧은 ‘하느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지, 인간이 그 생각이나 계획을 알아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협박하거나 부추길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인간인 우리의 몫은 그분의 구원을 고대하며 그분께 간청하는 것뿐이다.’(8,13-17)라며 원로들을 질책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대대로 역사에 남을 일을 할 것’이라며 자신의 말에 무조건 따르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 다음, 유딧은 과부의 복장을 벗고 화려한 옷차림(10,3-4)으로 적진으로 찾아갑니다. 아시리아인들은 그의 아름다움에 빠져듭니다(10,14.19.23). 그리고 그를 홀로페르네스에게까지 인도합니다. 유딧은 유다인들이 법으로 금지된 행동을 하려 해서 이제 곧 죄를 짓게 될 것이고 그래서 망하게 되었으니 도망쳐 왔다고 거짓으로 고합니다. ‘아름답고 슬기로운 언변’(12,21)을 지닌 그의 말에 장군부터 병사들까지 다 넘어갑니다. 유딧은 적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기도해야 한다며 꼭두새벽마다 진영 밖으로 나가는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렇게 4일이 지났습니다. 4일째 되는 날, 홀로페르네스는 연회를 열고 유딧을 어찌해보려 합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술을 무척 많이 마시고 잔뜩 취해 쓰러집니다. 이미 다른 이들은 다 물러나고 유딧과 단 둘만이 남은 상황입니다. 유딧은 과감하게 홀로페르네스의 칼을 집어 들고 기도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13,7) 적장의 머리를 잘라 자루에 담은 다음, 그는 여느 때처럼 기도하러 가는 척 적진을 빠져나와 배툴리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키오르는 그 머리의 신원을 확인해줍니다. 다음 날, 아시리아 군대는 혼란에 빠지고, 다른 민족들에 그들이 가했던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혀’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배툴리아의 소식이 전해지자 유다인들은 쏟아져 나와 아시리아 군대에 타격을 입히고 멀리 쫓아버립니다. 유딧을 앞세운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승리를 기뻐하는 축제를 엽니다. 유딧은 존경을 받으며 105세까지 장수했고, 그가 죽자 이스라엘은 일주일동안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사실, 유딧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아시리아가 아닌 바빌론의 임금이고, 메디아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홀로페르네스와 그의 시종 바고아스는 훨씬 후대의 페르시아 시대의 인물입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유다왕국을 멸망(기원전 587년)시킨 인물인데, 유딧 4장은 이스라엘이 유배에서 귀환해(538년) 성전을 재건(515년)하고, 대사제와 원로단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또 배툴리아라는 지명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과장된 표현(성전의 제단까지 자루옷을 두르고, 아시리아 군대가 수십 킬로에 걸쳐 진을 쳤다 등)과 마지막의 판관기식의 전개 등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교훈을 전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보호해주신다. 그러면 누구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다.’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선언부터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성, 속죄와 단식, 간구와 기도, 정결례와 음식에 대한 규정의 준수 등, 후기 유다문학이 강조하던 것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디나(창세 34장), 미르얌(탈출 15장), 드보라와 야엘(판관 4장) 등이 투영된 유딧의 모습은 여인도 이스라엘 역사의 한 축이라는 것을 말하며, 하느님께서 약한 이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천한 이들의 하느님, 비천한 이들의 구조자, 약한 이들의 보호자, 버림받은 이들의 옹호자, 희망 없는 이들의 구원자”(유딧 9,11) 그분이 바로 유딧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이십니다. [2018년 12월 30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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