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4) 성령 강림(사도 2,1-13)
성령으로 일치돼 예수님 위업 전한 제자들 - 오순절의 첫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집에서 일어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자 하느님의 영인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진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장 레스투(1692~1768)의 ‘성령 강림’ 그림.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 사건이 유다를 대신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은 다음에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저자 루카는 첫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의 상황을 마치 현장을 중계하듯이 소개합니다. 성령 강림은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일어납니다.(2,1) 오순절은 과월절, 초막절과 함께 유다인들의 3대 명절에 속합니다. 오순절은 과월절, 곧 파스카 축제가 지나고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음을 고려한다면(사도 1,3), 오순절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째 되는 날인 셈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 강림이 일어났을 때에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었다”(2,1)고 전합니다. 그들은 누구였을까요? 마티아 사도를 뽑았을 때 함께 있던 이들, 사도들을 포함해 120명가량 되는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사도들과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던 이들, 곧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랐던 여자들도 있었겠지요.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는 그곳은 어디일까요? 확실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사도 1,13)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카는 이어 성령 강림의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2,2-3) 구약성경에서 바람이나 불은 하느님의 힘이 작용한다는, 하느님 현존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주목할 점은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아니라 “각 사람 위에” 곧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앉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본문에는 아직까지 성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루카는 불꽃 모양의 혀가 각 사람 위에 내려앉은 다음에야 비로소 성령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2,4) 12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성령 세미나에서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겠지요. 대단히 시끄러웠을 것입니다. 그 소리에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옵니다. 그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2,6)이었습니다. 독실한 유다인이란 유다교의 율법과 전통에 충실한 또는 적어도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라고 하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다인 공동체에 있던 사람들로서 예루살렘에 잠시 다니러 온 사람들이거나 예루살렘에 한동안 눌러살고 있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을 맞아 순례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와서 보고는 놀라고 신기해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플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2,7-11)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방들이 오늘날 어디인지 잠시 알아봅니다. 파르티아와 메디아와 엘람은 오늘날의 이란 지역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 카파도키아는 터키 동부 지방, 폰토스는 터키 북부의 흑해 연안, 아시아는 터키 서부 에게해 연안, 프리기아와 팜필리아는 터키 중남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보면 지중해 일대와 북아프리카, 중동 근동 지역인데, 당시에는 ‘땅끝에 이르는 모든 민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루카는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루카 24,48), 사도행전의 이 대목은 이 말씀이 이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더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방마다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모두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사람들이 쓰는 말이 서로 갈라진 것은 바벨탑 때문이라고 전합니다.(창세 11,1-9)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교만과 야욕이 바벨탑을 쌓았고 그 결과로 말이 갈라지는 혼란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데도 듣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지방 말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혼란이 극복되고 일치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지만, 성령께서는 일치와 이해를 가져다주십니다. 둘째, 말소리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단지 자기네 말로 들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위업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듣게 된 것은 단지 말이 통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태어난 곳은 서로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지만 “독실한 유다인들”이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들이었기에 제자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위업’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었다”(2,13) 하고 전합니다. ‘새’ 포도주에 취했다고 말한 이유는 오순절이 첫 수확을 끝내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는 추수감사절이어서 새 포도주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이제는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층방에 내립니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전은 여전히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영인 성령이 거처하시는 궁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이 모인 곳에 첫 번째 성령 강림이 일어난 이후 사정은 달라집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입니까. 그런 우리 모임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십니까?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사도행전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이런 물음을 계속 던지며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월 27일, 이창훈 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