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다시 읽기] 회개와 구원을 선포한 ‘구약의 복음사가’ 이사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이사 56,1) 이사야 예언자는 누구인가 로마의 스페인 광장 한 켠에는 ‘무염시태 성모 기둥(Colonna dell’Immacolata)’이 있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 해마다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되면, 소방관이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가 기둥 꼭대기에 있는 성모상에 화환을 걸어 공경을 표현하는 전통으로 유명한 기둥입니다. 이 기둥을 둘러싼 구약의 네 인물의 동상(모세, 다윗, 이사야, 에제키엘) 중 이사야의 발치에는 날카롭고 커다란 톱이 놓여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그렇습니다. 이사야가 순교한 도구이지요. 교회의 ‘로마 순교록’은 이사야가 남유다의 악한 임금 므나쎄(기원전 687~642년 치세) 때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하는데, 외경 ‘이사야의 순교와 승천’과 탈무드에 따르면 임금의 명으로 그를 톱으로 켜서 둘로 찢어 죽였다고 하지요. 성경은 이사야의 순교 장면을 말하지는 않지만 므나쎄가 무죄한 이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는 사실(2열왕 21,16)과 톱으로 잘려 죽은 구약 인물들이 있었다는 사실(히브 11,37)은 언급합니다. 전쟁의 위기, 임금의 즉위나 기념일 등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이사야가 신탁을 통해 임금들의 정치적 행보에 개입한 것을 보면, 그가 유력한 궁정 예언자였음은 분명합니다. 또 여러 임금들을 그토록 통렬히 질책했는데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그가 왕족 출신이었다는 유다 랍비전승의 기록들도 상당히 개연성이 있습니다. 고위 신분 출신의 궁정 예언자였던 이사야가 톱으로 찢겨져 순교했다면, 그가 선포했던 하느님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더 궁금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살던 시대 이사야는 “우찌야 왕이 죽던 해”(기원전 740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이사 6,1) 요탐과 아하즈, 히즈키야 세 임금의 시대에(1,1) 궁중 예언자로 활약했습니다. 그의 행적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남유다 침공(701년) 전후이니(36~39장), 실제 활동 시기는 약 40년간(740~701년)이 되겠네요. 이 시기는 잠시 주춤했던 아시리아가 새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 3세의 등극으로 다시 정복 정책을 펼쳤던 때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가 외세의 압박과 내부 갈등(우상숭배, 사회정의 붕괴)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이사야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이집트나 아시리아 같은 주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지 말고, 또 헛된 우상들 사이에서 풍요와 안정을 찾지 말고 부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 의탁하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호소였지요. 이사야서에 직접 등장하는 임금은 아하즈와 히즈키야인데, 그러고 보니 당시 시대상이 주요 인물들, 곧 이사야(‘주님께서 구원하신다’)와 아하즈(‘주님께서 붙드신다’)와 히즈키야(‘주님께서 내 힘이시다’)의 이름 안에 다 들어 있네요. 이사야는 ‘오직 주님만이 구원하신다.’라고 선포하며 아하즈 임금과 백성을 ‘붙들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뿌리치고 인간적인 방편만을 찾았고, 반면 히즈키야 임금은 이사야와 함께 ‘하느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아’ 외세의 위협과 우상숭배의 위기를 극복해 냈으니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서 제1부, 제2부, 제3부? 이사야 예언서는 66개의 장으로 구성된 긴 책으로, 분량이 구약 성경 전체의 무려 6%에 달합니다. 성경은 유독 이사야서를 제1부(1~39장), 제2부(40~55장), 제3부(56~66장)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왜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세 부분의 저자와 저작 연대와 신학적 내용 등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역사상의 이사야의 삶(기원전 740~701년 활동)과 직결되는 부분은 제1부뿐입니다. 이후로는(40~66장) 이사야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지요. 제2부는 더 이상 아시리아가 아닌 바빌론과 유다의 귀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바빌론 유배시대(587~538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실제 이사야의 삶과는 벌써 2세기나 멀어졌네요. 게다가 제3부는 아예 바빌론에서의 귀환 이후의(538~520년) 이스라엘 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각 부분의 저자를 제1이사야, 제2이사야, 제3이사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그럼 완전히 다른 세 권이잖아?’ 하고 이상하게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서로 다른 세 권의 책이 하나로 묶인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원래 예언 전승(제1부)이 시대에 맞게 재해석되어 그 내용이 확장된 것, 곧 ‘한 권의 책이 시대를 지나며 성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언서 모두가 그렇습니다. 예언자 한 사람이 쭉 이야기한 것을 누군가 그대로 받아 적어 곧바로 출판한 것(?)이 아니지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에”(히브 4,12) 예언자가 선포했던 하느님의 말씀은 수백 년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 맞게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기록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언서들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사야서의 세 부분이 왜 한 권의 책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6장) 이사야가 활동을 시작할 무렵, 이스라엘은 제 주인을 알아보는 소와 나귀보다도 못하고(1,2~3)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같은(1,4~9) 백성이 되어 거짓된 경신례(1,10~15)와 사회불의(1,21~23)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우찌야가 죽던 해, 이사야는 환시 중에 천상어전에 좌정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어좌 위를 날아다니는 사랍들(‘세라핌’: 구품九品 천사들 중 최상 존재들로 하느님 가장 가까이서 그분을 찬양하고 섬김)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지극한 영광과 거룩함 앞에서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하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했고, 하느님께서는 “제단에서 타는 숯”으로 그의 입술을 깨끗이 하시고 모든 부당함을 씻어주셨습니다. 천상의 하느님을 두 눈으로 뵈었고 그분께서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그의 가슴이 얼마나 뜨거웠을까요. 당신 백성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하셨을 때 이사야는 망설임 없이 외쳤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유다 전승에 따르면, 므나쎄 임금은 바로 이 체험 때문에 이사야를 죽입니다. 하느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 구약 시대의 통념상 이사야의 체험은 불가능한 일이니, 하느님을 뵈었다 하는 그를 신성모독으로 몰아 죽인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과의 진실된 만남이 이사야를 평생토록, 죽음의 순간까지도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거룩함으로 지켜 주었으리라는 것을 어찌 의심조차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미사 중에 천상의 사랍들과 함께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6,3) 노래할 때마다 ‘아, 내가 지금 하느님의 천상어전에 나와 있구나!’라고 깊이 의식한다면, 매번 이사야와 같은 가슴 뜨거운 체험을 하고도 남겠지요. 임마누엘 예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7장) 아람 임금 르친과 북이스라엘의 임금 페카는 아시리아에 맞서 아람-에프라임 동맹을 결성하고, 남유다 임금 아하즈에게 동참을 강요하며 전쟁을 일으켰습니다.(기원전 736~734년)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아하즈에게 이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니, 너는 오직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었지요. 사실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보통 바람직하지 않지만(루카 1,18~20 참조) 아하즈의 불신이 오죽했으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라고 응답합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표징을 요구하지 않는 아하즈의 겸손, 믿음’이라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이지요. 표징이 주어지면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라도 이젠 이사야의 말을 따라야 할 텐데, 아하즈는 아시리아를 버리고 하느님께만 의탁할 용기가 전혀 없었기에 자신의 불신을 감추기 위해 표징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그 유명한 임마누엘의 신탁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사실 일차적으로는 임마누엘 예언의 “젊은 여인”은 아하즈의 아내 아비야를, 탄생할 “아들”은 아하즈의 아들 히즈키야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 속에 하느님께서 왕실에 새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 자체가 구원의 의미였으니까요. 그러나 이후 남유다가 멸망하고 바빌론 유배를 겪으면서 이스라엘은 그 예언이 말하는 “아기”의 약속이 멸망한 남유다의 임금이 아니라 세상 만민이 하나의 백성이 되어 영원히 하느님을 섬기는 나라의 ‘메시아 임금’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2,2~5; 8,23~9,6; 11,1~9)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천사가 우리에게 계시해 주었지요.(마태 1,23) 이사야에게 귀 기울였던 성왕 히즈키야(36~38장) 히즈키야는 즉위하자마자 종교개혁을 실시하고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을 정벌하여 영토를 넓혔으며(18,1~8) 주변국들과는 달리 아시리아에게 굴복하지 않았던 임금이지요. 이사야는 주님께 의탁하지 않고서 다른 국가들, 특히 아시리아의 정적인 이집트와 군사 동맹을 맺는 것은 아무 쓸모없다고 한결같이 조언했지만(이사 30,1~7; 31,1~3) 초창기의 히즈키야는 정치면에서는 이사야와 뜻이 달랐습니다. 히즈키야는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고 반아시리아 봉기에 가담했다가, 믿었던 이집트에게 배신당하고 아시리아에게 패하여 굴욕적인 충성 서약까지 해야 했지요. 그러나 기원전 701년 다시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온 유다 지방을 정복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비로소 히즈키야는 이사야에게 도움을 청하고서 그와 함께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으로 하느님의 천사가 십팔만 오천의 적군을 몰살시켰던 일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이사 37장) 이후에도 이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귀 기울였던 히즈키야에게는 많은 이적이 따랐습니다. 죽을병에 걸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추어 슬피 울며 기도했을 때, 하느님께서 그의 수명을 연장해주셨던 일은 유명한 일화지요.(38장)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하느님께서 즐겨 들어주시는 기도란 어떤 것인지, 요즘 나의 기도는 어땠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제2이사야서(40~55장)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제2이사야서는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40,1) 하시는 하느님의 다정한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유배 중(기원전 587~538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말씀이 주어진다는 것은 이전의 예언자들, 곧 아모스와 호세아, 이사야와 미카 등이 경고했던 징벌과 보속의 기간이 이제 끝났음을 의미합니다.(40,2) 과거를 반성하고 오직 하느님만이 구원의 빛이심을 깨달은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가 온 것이지요. 제2이사야서에서 특히 ‘주님의 종’에 관한 네 개의 신탁(42,1~7; 49,1~7; 50,4~11; 52,13~53,12)을 다시 한 번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이 신탁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예언자요 군왕의 면모를 지닌 ‘주님의 종’에 대해 노래하는데, 유다인들은 그를 구약의 여러 인물들 또는 아직도 오지 않은 메시아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 분은 이미 세상에 오신 메시아,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이지요. 특히 셋째, 넷째 노래는 우리를 위해 수난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그 희생의 의미, 당신 아들을 바라보셨던 하느님의 마음 그 모두가 녹아있는 참으로 소중하기 그지없는 본문입니다. 제3이사야서(56~66장) 바빌론 유배를 겪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고 당장 꽃길만 걷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큰 희망을 품고 유배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처음 느낀 것은 깊은 좌절이었지요. 저자는 이스라엘이 누릴 영광된 미래가 미뤄지고 있는 이유가 하느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59,1~2) 아직도 과거의 죄스런 삶을 떨쳐버리지 못한 백성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56,9~12; 57,3~13; 59,1~15) 그러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도래할 이스라엘의 영광과 구원을(60~62장), 나아가 온 세상 민족들이 하느님 앞에 나아와 그분을 섬기게 될 날을(56,1~8; 66,18~21) 앞서 바라보며 백성에게 희망을 북돋웁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56,1) 구원의 날을 지치지 않고 희망하며 참된 예배와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하는 우리의 귓가에 아버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58,8)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 신학교에 입학한 지 오래지 않았을 무렵, 이사야서를 읽다가 “복을 받아라, 내 백성 이집트야, 내 손의 작품 아시리아야”(19,25)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어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이스라엘 역사를 뻔히 아는데, 갑자기 ‘배신자’ 이집트와 ‘탐욕스런 폭군’ 아시리아를 당신의 백성, 당신의 작품이라 부르며 축복하시는 하느님을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뵈었던 하느님, 그가 선포했던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현재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온전히 통틀어 영원을 보고 계신 분임을 말이지요. 비록 ‘지금’은 당신을 등지고 죄스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반드시 당신 품 안의 자녀로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지금’ 그들과 관계 맺으시고 ‘지금’ 그들을 축복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할까요. 혹시 여러분 주변에도 ‘이집트 같은 사람’, ‘아시리아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말인가 싶으신가요? 믿었던 이집트가 정작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배신했듯이, 내 신뢰를 쉽게 저버리고 나를 이용하며 이기적으로 대할 뿐, 나를 위해 희생할 생각은 조금도 없는 사람 말입니다. 또 이스라엘을 압박하며 공격했던 아시리아처럼, 늘 내게 해만 끼치고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서 신앙생활에 방해만 되는 사람 말입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 때문에 내 마음에 항상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면, 정말 ‘나만 손해’(!)입니다. 하느님은 지금의 그 사람을 “내 백성”, “내 작품”이라 따뜻이 부르며 그와 관계 맺고 계시니까요. 지금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그 사람 때문에 내 상처가 크지만, 언젠가 거룩하게 완성될 그의 모습을 앞당겨 바라보시고 ‘지금’ 그를 사랑하고 계신 하느님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회개가, 사람의 일에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믿음의 삶이 내게 시작될 것입니다. [월간빛, 2019년 3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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