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얼굴을 마주하는 형제(창세 32-33) 야곱의 집념의 대상에서 잠시 벗어나, 야곱과 그의 형 에사우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하란으로 도망을 친 야곱. 그는 그곳에서 혹독한 보속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혹독하기도 하였지만, 가정을 꾸리면서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20년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아직 형의 화가 풀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제 일어나서 이 땅(하란)을 떠나 네 본고장으로 돌아가거라.”(창세 31,13). 이 말씀을 듣고 야곱은 하란에서의 20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고향을 향해 떠나갑니다. 창세 28-31은 야곱의 하란에서의 20년의 시간을 알려줬다면, 이어지는 창세 32-33장은 야곱이 단 이틀 동안 겪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단 이틀의 시간일 뿐이지만, 야곱은 더 큰 성숙을 이루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으로 다가옵니다. 이틀의 시간 동안 하느님께서는 야곱이 형 에사우를 만날 준비를 직접 시켜 주십니다. 그 과정은 세 단계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을 만남 →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 하느님과 만남. 먼저 야곱은 하느님의 천사를 만나고 “‘이곳은 하느님의 진영이구나’ 하면서,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릅니다(창세 32,2-3). 마하나임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진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진영이 둘로 나뉘는 모습은 형 에사우를 만날 때, 자신의 무리를 둘로 나누는 행위의 복선 역할을 수행합니다. 야곱은 형 에사우를 만나기 전인 지금의 시간이 바로 그 위험과 어려움의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께 간절한 기도를 봉헌합니다(창세 32,10-13). 기도를 봉헌함과 동시에 야곱은 에사우에게 줄 선물을 마련합니다. 각기 다른 9개의 가축 무리의 행렬을 보내면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물을 먼저 보내어 형의 마음을 풀어야지. 그런 다음 그를 보게 되면, 그가 나를 좋게 받아들일지도 모르지”(창세 32,21). 이 부분은 약간 의역이 가미되었습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하면, “나는 선물로 그의 얼굴을 덮고, 그 선물은 내 얼굴에 앞서가며, 그리고 나서는 나는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아마도 그는 나의 얼굴을 들어주겠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옮겨지지 않은 얼굴이라는 단어가 무려 네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형의 뒤꿈치를 붙잡으면서 시작된 야곱의 여정이었습니다. 얼굴을 감추고 형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제는 형의 얼굴을 마주하려 합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희망을 표현한 것이지요. 이러한 과정을 겪고 야곱은 홀로 밤을 맞이합니다. 어둡고 누구도 야곱을 대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합니다.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뼈를 칩니다(창세 26). 하지만, 야곱은 자신의 이름처럼 집념을 갖고 그를 붙잡고 그에게 축복을 청합니다(창세 27). 야곱은 그 정체불명의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야곱이라고 밝힙니다(창세 28).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고 있지요? 바로 ‘사기 치는 사람’입니다. 낯선 사람 앞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그 사람에게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창세 29). 지금까지의 삶은 붙잡고 속이는 삶을 살아왔던 야곱이 이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됩니다. 하룻밤 사이에 야곱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이렇게 변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야곱은 형 에사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형 앞에서 일곱 번 절을 하면서(창세 33,3), 과거 형의 맏아들의 권리를 넘보던 모습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형 에사우도 야곱의 얼굴을 향해 달려와서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야곱은 용서하는 형의 얼굴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창세 33,10). 용서하는 형의 얼굴 속에서 야곱은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20년의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두 형제는 이렇게 화해를 하게 됩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의 갈등과 분열이 화해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 20년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당장 화해하지 못함에 불편하신가요? 하느님께서 그 불편함의 자리를 내어드리고, 나의 시간과 나의 문법이 아닌, 그분의 시간과 그분의 말씀에 귀기울이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내가 원할 때는 아니겠지만, 하느님의 이끄심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19년 4월 7일 사순 제5주일 인천주보 4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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