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밭에 숨겨진 보물과 진주 상인
우리는 정말 무엇을 원할까?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우리는 정말 무엇을 원할까?(What Do We Really Want?)” 이 느닷없는 질문은 윌리암 베리William A. Barry 신부의 『Now Choose Life』 라는 책의 첫 장에 나오는 제목입니다.1) 오래전에 읽은 책의 첫 페이지 제목이 지금까지 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질문을 가끔 던지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수많은 대답을 쏟아낼 것입니다. 좋은 직장을 얻기를 바랄 수도 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건강한 자녀를 얻기 바랄 수도 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담에 말 타면 종을 두고 싶다고 했듯이 누구나 이런저런 갈망들이 목마름처럼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계속됩니다. 이런 갈망들은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갖고 싶은, 어디엔가 있을 보물을 향한 갈망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밭에 숨겨진 보물’과 ‘진주를 찾는 상인’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얻고 싶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의 최종 목적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물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하늘나라를 비유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 비유’는 농부가 밭을 갈다가 우연히 발견한 보물입니다.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위치한 독특한 지정학적 이유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주변 침략자들에게 수도 없이 점령을 당했던 전쟁터였습니다. 따라서 항상 약탈의 위협을 받던 지역이라 동전과 보석 등 귀한 보물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것들을 토기에 담아 땅에 묻어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후대 사람들이 땅속에서 우연히 이런 보물들을 발견하곤 했는데, 당시 유대 랍비 율법에는 발견한 사람이 합법적인 소유자로 인정되었습니다. 한편, ‘진주 상인의 비유’는 진주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연히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농부와는 달리, 이 상인은 더 값진 진주를 찾다가 마침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아주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당시는 다이아몬드 세공 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라 아름다움과 크기를 잘 갖춘 좋은 진주는 그 어떤 것보다 재산상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상인은 진주의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하고서라도 그 진주를 샀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사실 마태오 복음이 기록될 당시(A.D. 80년경) 초기 교회 구성원들, 즉 이교도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유다교인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습니다. 이교도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비유 말씀처럼, 우연히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콜로 2,3 참조)을 발견하고 온통 그분께 사로잡힌 이들을 말합니다. 한편으로 좋은 진주를 찾은 상인의 비유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에 해당되는 비유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약의 하느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율법과 기도, 예배 등 이미 진주가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더할 나위 없는 인생의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분을 따르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유다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으로부터도 배척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마태 10, 37-39 참조) 죽음을 무릅쓰는 온갖 박해를 견뎌야 했습니다(사도 4,1-31; 5,17-42; 6,8-7,60 참조).2) 두 비유는 공통적으로 자신이 발견한 보물에 압도되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당시 초기 공동체 신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령이 충만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이제는 세상 모든 것을 버려도 좋을 인간 갈망의 원천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가난함 속에서도 그들은 참된 기쁨을 맛보았고, 유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족마저 등을 돌린 슬픔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았으며, 박해 속에서도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들은 참행복을 선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행해진 ‘참행복’(마태 5,3-12 참조)은 단순히 관념적인 행복이 아니라 그들이 슬픔과 박해 속에서도 누렸던 행복을 고백한 것이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공동체의 행복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Happiness)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어의 행복, 즉 Happiness의 어원이 되는 Hap은 “happen” 또는 “happenstance”에서 나온 것으로 ‘우연히 얻은 기회’나 ‘행운’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의 충만함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재산의 획득에서 오는 즐거움처럼, 생성되고 소멸되는 우리의 감정이나 느낌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교회 신자들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약성경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행복은 그리스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들의 행복’ 즉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행복’(Elysium)을 표현하는 것으로,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과 같은 것입니다.3 하느님께서 창조의 마지막 엿샛날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라고 끝을 맺는데 이 행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주신 축복, 존재의 원천에서 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경탄한 창조의 세계에서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하느님과 에덴동산을 거닐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조화롭게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이러한 창조 목적의 온전한 성취를 그린 신비의 세계, 곧 충만한 기쁨을 드러내는 하늘나라의 표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갈망의 원천은 이런 하느님 창조의 목적(intention)을 향해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 존재 안에 깊숙이 새겨져서 우리의 갈망과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님 안에 쉬기까지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라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처럼, 우리 존재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햇볕이 머리 위를 내리쬐는 정오, 하루 중 가장 목마름의 시간, 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우연히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방 지역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어쩌면 이리저리 버림을 받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일 수도 있고, 끊임없이 욕망을 쫓아 사는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그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목마름의 여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이 목마름의 여인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듯, 또는 더할 나위 없는 진주를 발견하듯,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5-14 참조) 그녀는 자신의 목마름의 목적지가 주님임을 깨닫습니다. 그녀의 방황도, 두려움도, 인생의 목마름도 그분 안에서 끝이 납니다.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은 우리 인생의 보물을 사마리아 여인이 우리를 대신해 발견해주었습니다. 다시 서두의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원할까?” 바로 이 질문 안에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값진 진주’가 있습니다. 이것을 찾은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1) William A. Barry, 『Now Choose Life』, Paulist press, NY, 1990, 1. 참조. 2) Msgr. Michael J. Cantley, 『The Enchantment of the Parables』, St. Paul, 2010, 20-31 참조. 3) Robert Ellsberg, 『The Saints' Guide to Happiness』, North Point Press, 2003, viii-ix 참조.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5월호, 전원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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