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8)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1-53) (1)
“보이는 것에만 집착해 예수님 거부하지 않았는가” -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에게서 모세,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완고함을 질타한다. 사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거쳐 갔던 시나이 광야. 가톨릭평화신문 DB. 지난 호에서 봤듯이 스테파노와 논쟁에서 진 사람들이 거짓 증인을 내세워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하게 합니다. 최고의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쏠리고 스테파노 얼굴은 천사 얼굴처럼 보였습니다.(6,8-15) 대사제가 “그게 사실이오?” 하고 묻고 스테파노는 긴 설교로 답변합니다.(7,1-53) 이 설교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설교 중 가장 깁니다. 스테파노는 이 설교에서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모세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압축해서 전하면서 자신이 선포하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스테파노는 “부형 여러분, 들어보십시오”(7,2ㄱ)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부형(父兄)”이라는 표현은 그 자리에 여자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자는 산헤드린, 곧 최고의회의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요. 스테파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살 때에 “네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하란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합니다.(7,2-3) 그런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전하는 내용과 차이가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하신 하느님 말씀을 들은 곳이 하란으로 나오기 때문이지요.(창세 11,31─12,5 참조) 「주석 성경」에서는 이 차이에 대해 스테파노가 창세기 말씀보다는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레아의 대표적인 유다인 철학자 필론(B.C. 15?~A.D.45?)과 역사가 요세푸스(37/38?~100?)가 전하는, 성경 이외의 전통을 따랐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바로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아브라함과 할례의 계약을 맺어 주십니다. 아브라함 자신은 한 치의 땅도 상속 재산으로 받지 못했지만,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을 따랐으며 또 자식에게 계약의 할례를 베풀었습니다.(7,4-8) 아브라함은 당장 손에 넣은 것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또 후손들을 위해 하신 하느님 말씀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설교라는 긴 이야기의 첫째 마당이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둘째 마당은 요셉 이야기입니다.(7,9-16) 요셉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선조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테파노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말합니다.(7,9)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기에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로 이집트에 팔려가면서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지혜로 이집트와 자기 온 집안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가서 재상이 되고 형제들과 친족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와 그곳에서 살다가 죽고 묻히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이야기의 셋째 마당은 모세에 관한 것입니다.(7,17-44) 스테파노는 셋째 마당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짐하신 약속이 실현될 때가 다가오자”(7,17)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7,6 참조)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실현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실현하시기 위해 택하신 도구라는 점이 부각됩니다. 스테파노는 모세가 죽지 않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이집트 왕실에서 자라나게 된 과정, 마흔 살이 되어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동족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동족의 배반으로 미디안 땅으로 가서 살게 된 일, 다시 40년이 찼을 때 떨기나무 불길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일,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조상들 사이의 중개자가 되어 “살아 있는 말씀” 곧 율법을 전해 준 일, 그러나 조상들이 순종하지 않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던 일 등을 열거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스테파노의 이 설교에서 모세가 예수님의 예형으로 제시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모세를 두고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다”고 하는 묘사(7,22)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한 묘사(루카 24,19)와 같습니다. 모세가 동족을 도우려 했으나 오히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라며 반대를 받은 것(7,27), 이적과 표징을 일으키며 백성을 이끌어낸 것(7,36), 모세를 지도자와 해방자(7,35), 예언자로(7,37), 또 살아 있는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는 중개자로 여기는 것(7,38) 등도 모두 모세를 예수님의 예형으로 제시하는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테파노가 긴 설교로 이야기하는 핵심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로 이어지는 조상들의 위업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보게 되겠지만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해방자요 구원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조상들의 불충을 지적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적은 또 다른 목적을 띱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2) 이 말씀에 아브라함은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된 땅 가나안에 왔지만, 정작 자신은 그 땅을 한치도 상속 재산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들의 몫이었습니다. 그 후손들 또한 4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또 40년을 광야에서 헤맨 끝에 비로소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자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면서 하느님 말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라고 썼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낸 위대한 영도자요 해방자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약속의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이끌고 죽을 고생을 해 가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역할로 그쳤습니다.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맛있는 죽을 실컷 쑤어서 남에게 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어리석기조차 한 아브라함과 모세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혈안이 돼 있는 오늘의 세태에 거꾸로 경종을 울리는 모범입니다. 그 경종의 극치가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십니다. 스테파노는 지금 그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는 어떤 분을 어떤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26일, 이창훈 위원] [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19)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1-53) (2)
성령을 거역하는 최고의회의 완고함 질타하다 - 스테파노는 하느님을 배신한 조상들의 이야기를 통해 성령을 거역하는 최고의회 사람들의 완고함을 질타한다. 사진은 예루살렘의 스테파노 문. 스테파노가 이 문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해서 스테파노 문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 성전에 희생물로 바치는 양들이 이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고 해서 양 문이라고 하고, 사자 문양이 있어서 사자 문이라고도 한다. 최고의회 사람들 앞에서 한 스테파노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따랐는지, 또 하느님께서 어떻게 함께하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7,1-38) 둘째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과 성전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 최고의회 사람들을 직접 겨냥합니다.(7,39-53) 이 둘째 부분을 중심으로 스테파노 설교를 계속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7,39-43) 하느님께서 지도자요 해방자이자 예언자로 보내주신 모세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 스테파노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우리 조상” 곧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순종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은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7,39)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모세의 형 아론에게 자기들을 이끌어줄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송아지를 만들어 희생제물을 바치며 즐거워하지요.(7,40-41; 탈출 32,1-6) 그들이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를 섬기게 내버려 두셨다”고 스테파노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느님을 섬기기보다는 “몰록의 천막과 너희 래판 신의 별을, 곧 너희가 경배하려고 스스로 만들어 낸 상들을 떠메고 다녔다”고 아모스 예언서를 원용해 지적합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유배 생활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7,42-43; 아모 5,25-27) 몰록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에서 섬기던 태양신을 가리키고 래판은 별신의 하나입니다. 하늘의 군대는 하늘에 있는 태양, 별, 달 같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통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며 하느님을 배신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서의 말은 또한 바로 이어오는 하느님 거처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의 거처(7,44-50) 스테파노는 이제 하느님의 성전으로 이야기 방향을 돌립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모세가 만든 ‘증언 천막’ 곧 증언 궤를 모셔두는 ‘만남의 천막’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다윗 시대까지 증언 천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증언 궤가 있는 증언 천막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증언 천막 대신에 하느님의 거처를 새로 만들고자 했지만, 하느님을 위해 집을 지은 왕은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7.44-47) 그런데 스테파노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는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7,48)고 단언합니다. 그러고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 자기 말을 정당화합니다. “하늘이 나의 어좌요 땅이 나의 발판이다. 너희가 나에게 무슨 집을 지어주겠다는 것이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또 나의 안식처가 어디 있느냐?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지 않았느냐?”(7,49-50; 이사 66,1-2) 스테파노의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스테파노의 생각이 부정적임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실제로 당시 그리스계 유다인들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하지 않더라도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스테파노 주변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정통 유다인들에 비해 성전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춰 보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를 고발한 거짓 증인들이 “이 사람은 끊임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합니다. 사실 저희는 그 나자렛 사람 예수가 이곳을 허물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준 관습들을 뜯어고칠 것이라고,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6,14-15) 하고 말한 것도 성전을 낮춰보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스테파노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보다는 “여기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있다”(마태 12,6)고 하신 예수님이 더욱 크고 중요함이 분명합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들(7,51-53)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사람 손으로 지은 집에는 살지 않으신다”고 주장한 스테파노는 이제 최고의회 의원들을 향해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하며 대놓고 질타합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여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하느님의 영 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테파노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합니다.(7,51) 스테파노는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하는 이유를 적시합니다. “그들(조상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7,52) 최고의회 의원들이 조상들과 똑같다고 비난했지만, 그 어조는 더욱 강했습니다. 조상들은 의로우신 분이 오시리라고 예고한 예언자들을 죽였지만, 최고의회 의원들은 의로우신 분 자체를 죽였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최고의회 의원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 조상들의 불충과 하느님의 처소, 그리고 최고의회 의원들에 대한 맹렬한 질타로 이루어진 스테파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은 우리에게도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났지만, 광야에서 마음은 이집트의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을 피하고 홍해 바다를 건너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은 오늘의 우리에게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의 여정에 해당합니다. 대탈출로 새 삶을 출발했지만, 광야에서 시련에 부닥치자 이스라엘 백성은 그만 옛 생활을 그리워하고 맙니다. 하느님은 눈앞에 보이지 않고 현실 삶은 고달프고, 그러니 뭔가 의지할 것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우리는 어떤지요? 세례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새 출발을 했지만 삶은 여전히 팍팍합니다. 아니, 하느님을 몰랐을 때보다 더욱 힘든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법을 따르며 살기보다는 지난날 살았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훨씬 편했던 것 같고, 그래서 자꾸만 그 길을 돌아봅니다. 이렇게 뒤돌아보는 일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하느님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시작합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좇으려 하고 성령을 거역합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렇지는 않은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과 귀에 다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분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6월 2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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