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요나 홍수로 세상이 물로 가득 찼을 때, 노아는 물이 빠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 한 마리를 날려 보냅니다.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을 보고 물이 빠져 마른 땅이 드러났음을 알게 됩니다(창세 8장). 비둘기는 여기서 하느님의 진노가 가시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소식을 알려주는 상징, 바로 희망의 메신저가 됩니다. ‘비둘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예언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도 바람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창세 8,1)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은 죄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거두십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요나가 그 주인공입니다. ‘요나’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요나 1,1)라고 소개되는데 같은 말이 2열왕 14,25에도 있습니다. 거기서는 그가 ‘갓 헤페르 출신’이라 하는데, 요나서에 등장하는 이가 같은 예언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과거의 한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후인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다는 입장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요나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일어나 가라”(요나 1,2)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죄악이 치솟아 오른 니네베를 벌하겠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4,2).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4,2) 그래서 그는 차라리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합니다. 그는 ‘주님을 피하여 달아납니다.’(4,3.10) 그가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에 대해 요나서는 ‘내려간다.’고 표현합니다. 요나는 야포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탑니다. 그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드러누워 깊은 ‘잠이 듭니다’(히브리말로는 내려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큰 바람을 보내셔서 배가 난파의 위기에 처합니다. 배에는 난리가 납니다.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비를 뽑아 알아봅니다. 그러자 배 밑창에서 자던 요나가 나옵니다. 무슨 일인가 묻는 그들에게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오. 나는 바다와 물을 만드신 주 하늘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오.”(1,9) 그의 이 대답은 한편으로는 맞고 한편으로는 모순됩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달아나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폭풍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1,12) 모른 척 잠이나 자고 있었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들은 요나의 제안대로 그를 바다에 던져 넣습니다. 심청이가 인당수의 거센 물결을 가라앉혔듯이 요나가 물에 들어가자 바다는 잔잔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과정을 목도한 배에 탄 이들, 폭풍 앞에서 ‘저마다 자기 신에게 부르짖던 이들’(1,5), 요나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모르던 그들(1,6)이, 요나를 물에 던질 때 ‘주님’이라며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께 간청하고 바다가 가라앉자 주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제물을 바치는 이로 변화됩니다.) 주님은 다시 ‘큰 물고기(고래가 아닙니다!)를 시켜 요나를 삼키게’(2,1) 하십니다. 요나는 사흘 밤낮이 지나서야 주님을 찾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요나의 기도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아직 물고기 배 속에 있는데, 이미 주님께서 구원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2,7ㄴ). ‘주님을 기억하는’(2,8) 순간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주님의 것’(2,10), 곧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것도 함께 고백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권위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그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다시 돌아갔음을 말해줍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물고기를 시켜 그를 육지에 뱉어내게 하십니다(2,11). 하지만 요나에게는 아직 더 많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다시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일어나 가라.” 요나는 니네베로 들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3,4) 이 짧은 선언 하나가 도시를 뒤집어 놓습니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3,5) 임금부터 짐승까지 모두가 회개의 표지인 자루옷을 입고 단식을 하며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2,5-8ㄱ). 그리고 ‘악한 길에서 돌아섭니다.’(2,8ㄴ.10ㄱ) 그러자 하느님은 당신의 진노를 거두십니다(2,10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요나와 하느님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요나의 투정이 터져나옵니다(4,2). 그는 ‘화를 내고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달라고 합니다.’(4,1.3) 하느님은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보라고 요구하십니다(4,4). 그러면서 아주까리를 통해 요나를 깨우치려 하십니다. 하느님은 더위에 고생하는 그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나 그늘을 만들게 하십니다. 요나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튿날 주님은 벌레 하나를 보내셔서 아주까리를 쏠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뜨거운 바람까지 보내십니다. 요나는 다시 한 번 죽겠다고 외칩니다. 다시 그가 화내는 것이 옳은지 물으시는 주님께 요나는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4,9ㄴ)라고 반항의 말을 쏟습니다. 주님은 잠깐이면 사라지는 식물을 동정하는 그를 지적하시며, 당신의 사랑 – 니네베라는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동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역설하십니다. 요나서는 여기서 끝납니다. 요나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했는지, 수긍했는지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어떤지 묻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배타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면서도 자비롭지 못한 우리에게, 우리의 모습이 정당한지 묻고 있습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고 자꾸만 ‘내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깊이 있게 살펴볼 일입니다. [2019년 5월 26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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