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미사’, 부담스럽나요?
좀 게으른 선배 신부 하나가 오래 전에 사제서품 후에 자랑스럽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이제 미사에 절대 늦거나 빠지는 일이 없을 꺼야.
내가 성당에 들어서야 미사가 시작되고, 혼자서도 미사를 할 수 있으니 말이야.
”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늦게 성당에 들어서는 신부를 쳐다보는 따가운
신자들의 눈총을 외면(?)할 수 있는 용기와 혼자서 벽을 보며 미사를
혼자 바치는 무안함을 참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본업(?)이 미사인 신부와는 달리 신자들이 미사에 참석하는 일은 때로 곤혹스런 일중의 하나이다.
바쁜 일상을 살다보면 미사에 가끔 늦을 수 있고, 미사 참례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거나, 하필이면 주일날 집안 어른 제사나 생신잔치,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들이 생길 수도 있다.
간혹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 신자들과 한 바탕 싸우고 나면 성당 근처에 가는 것이
싫은 것도 사실이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면 생업에 종사하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를 부담스럽게 여긴다.
아예 주말과 주일 내내 근무지를 벗어날 수 없는 신자들도 있다.
주일의 쉼도 그들에게는 예외이다. 그래서 주일 미사를 참석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 늘 고해성사거리 1조 1항에 속한다.
오랜만에 미사에 참석해도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그들이 냉담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러니 주일미사에 빠진 신자들의 마음은 오죽하랴?
솔직히 천주교 신자로서 주일 미사 참례는 기본적인 의무에 속한다.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야 한다”는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대로 한 주일에
한 번 주일을 지키는 일은 내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해 있다는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의 날”에 충실하게 그 분께 머물고 있음을 드러내는 감사와 찬미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88, 24).”
주간의 첫 날인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창조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일 미사에 ‘몸만’ 참례하는 것만으로 주일의 의무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일 미사 참례는 주일을 거룩히 보내고,
주님의 날을 경축하며, 주님의 성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신자로서의 마음의 의무를 드러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살다가 ‘불가피하게’ 주일 미사에 참석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그 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거나 주일에
뜻에 맞는 희생과 기도로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도록 교회는 권장한다(교회법 1248조).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때로 신부님보다 늦게 미사를 시작하고 먼저 퇴장하거나,
미사시간 내내 공상과 분심 속에 주보를 뒤적거리다가 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도 없이 성당을 떠나기도 한다.
성경책은 고사하고 가벼운 매일미사책이나 성가책 하나도 챙기지 않고,
주일날 들은 독서와 복음이 뭔지 기억도 못하면서 신자로서 주일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불가피하게 주일 미사에 빠져도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하는 의무를 지키는 일보다는 잠시 자기의 게으름과 타협하거나,
어쩔 수 없이 빠진 것이니 별 수 없다고 손을 놓는 신자들도 있다.
때로는 다음 주에 고해성사를 보면 된다는 식의 편의주의적 발상을 하고,
당장의 주일은 보통의 세상 사람들처럼 보낸다.
과연 주일 미사 참례는 부담스런 의무일까? 어떻게 주일을 감사와 축복으로 맞을 수 있을까?
독일에서 유학 중에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영성생활이
소홀해진다는 고민을 털어놨을 때 독일 영성지도 신부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학업과 영성을 조화롭게 하는 일은 천칭의 양쪽을 어느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잡는 일과 같습니다.
” 어느 쪽이던 극단은 늘 어려움을 낳기 마련인가보다.
대개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내 삶에 주어진 부수적인 선물처럼 여긴다.
그래서 힘들 때는 하느님을 간절히 찾지만, 내 일상이 편하면 하느님의 은총을 달리 구하는 일이 없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가는 한 주간의 시간도 온전히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사 참례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들은 요즘 같이 경쟁시대에
솔직히 부수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미사 참례도,
기도도 생활이 안정되어야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은 일상과 분리해서 별도의 시간으로 마련되어야할
스케줄의 일부로 여겨지기 쉽다. 이쯤되면 개신교가 강조하는
금전적인 십일조를 애써 무시(?)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하느님께 바칠
“시간의 십일조”에 더 인색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과연 나만의 것일까?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내게 시간을 선사해주신 하느님과의 만남이나,
내 주변에서 나와의 시간을 간절히 청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시간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한 주간이 공짜로 하느님께 받은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생긴다면
애초부터 시간의 우선순위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한 주간을 보내고 주일날 하느님이 주신 시간의 일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드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한 주간을 내 맘대로 쓰는 것도 모자라 주일까지도 거룩하게
시간을 보내는 데 인색하다면 과연 나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주변에 열심히 사는 신자들의 비결은 딱 한가지다.
앉으나 서나 내 것이라고는 실상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감사와 찬미는 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 비록 내 삶이 남에게 고통스러워 보일지라도 사는 것은 은총이요, 감사이며, 기쁨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기”(갈라 2, 20) 때문이다.
주일 미사가 부담스럽다고 말하기 이전에 나는 얼마나 내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는지 물을 일이다.
주일의 의무는 미사 참례만이 아니다.
자선과 희생이던 기도와 묵상이던 어떤 형태로든
주일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의 봉헌’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인천교구 사제/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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