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 사람들의 이야기] 욥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시나요?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고 받아주지 않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 고생하며 쌓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불타버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사랑하는 이와 생이별하고 눈물과 탄식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 사람, 아니 이렇게 할 힘마저 다 잃고 멍한 눈으로 먼 하늘만 바라보며 주저앉아 일어설 줄 모르는 사람, 그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요? 악인들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당당하게 말하고 부를 자랑하며 거리를 다닐 때, 성실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일들을 당한다면, 그 일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면, 어떻게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나요? ‘과연 하느님이 계시냐?’, ‘어찌하여 의인은 고통당하고 악인들은 저리도 잘 사는가?’ 물어오는 이들에게 어찌 대답해야 하나요? 이 질문은 단지 오늘만의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이들이 종교적 가르침이나 윤리도덕의 가르침과는 달리 전개되는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와 불공정, 모순 앞에서 답하려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도 ‘의인의 고통’이라는 주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의 문헌들과 고대 그리스의 비극들에서,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문화 속에서 이러한 흔적들이 발견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답을 내야 했습니다. “우츠라는 땅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욥 1,1ㄱ) 시대와 장소는 언급되지 않지만(그래서 이야기가 더 보편적인 것이 됩니다), 이 ‘동방인’(1,3)에 대한 이야기가 고통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아들 일곱에 딸 셋에, 만 마리가 넘는 가축과 종’을 지닌 ‘동방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자’(1,3)였습니다. 그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1,1ㄴ.8; 2,3), 그는 하느님 보시기에 ‘의인’, 진정한 ‘하느님의 종’(1,8; 2,3)이라고 소개됩니다. 굉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그의 의로움이 가식’이라는 사탄(갈라놓는 자)의 말에 하느님은 그에게서 ‘목숨만 남기고’(2,6)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사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는 집과 가축만이 아니라 자녀까지(!) 모두 잃습니다. 게다가 온 몸에 부스럼이 나서 사금파리로 몸을 긁는 지경에 이릅니다(2,7-8). 그래도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2,9)고까지 해도 그는 ‘흠 없는 마음’을 지킵니다. 여기까지는 의인 욥이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견디어 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받아들이는 자 욥을 소개하며 신앙인의 모범으로 추켜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기의 중심을 이루는 대화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욥의 불행에 대해 듣고 엘리파즈, 빌닷, 초파르, 세 친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욥과 대화를 시작합니다(3장-31장). 욥의 친구들은 당시에, 또한 우리 시대에도 만연한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따른 말을 건넵니다. ‘고통은 죄의 결과이며, 징벌은 회개를 요구하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고통은 당연한 것인데, 이를 통해 하느님은 인간을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서 당신께로 오라고 부르신다는, 곧 인간의 고통은 하느님의 교육 방식이라는 주장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욥에게 은밀하게 지은 죄가 있지 않냐고, 그러니 겸손하게 그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그래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입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은 무죄한데 어찌 징벌이 주어지냐고 반문합니다. 그는 ‘자신을 원수로 여기시는 하느님’(13,24; 33,10), 부당하게 자신을 박해하는 하느님(16,6-14; 19,6-11.21-22)에 대항하여 자신을 변호해주실 정의와 공정의 하느님(16,19-21; 19,23-27)을 찾습니다. 끈질기게 욥에게 고통의 죄의 결과라고 말하는 친구들 앞에서 욥은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하느님을 뵙기를, 하느님의 답을 요구합니다. 앞서의 욥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수용하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토하는 절규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찾아오시기 전에 엘리후가 간섭합니다(32장-37장). 그는 조금은 다른 입장입니다. 고통이 주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결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 앞에서 인간이 할 일은 단지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뿐이라는 주장입니다. 욥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분은 친구들은 철저히 무시하심으로써 그들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욥에게만 말을 건네십니다. 그러나 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단지 욥에게 자연과 동물, 세상의 현상들을 말씀하시며 인간 욥이 아무리 해도 헤아릴 수 없는,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혼돈,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이 제어하시는 그 혼돈(‘혼돈의 질서’ -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통해 하느님은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욥을 당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를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놓으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 욥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42,1-6)하고 입을 닫습니다. 그는 이제야 진정 하느님의 종, 하느님의 신비 앞에 무릎 꿇는 이가 된 것입니다. 욥은 자신의 삶과 체험에서 오는 고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 친구나 엘리후나 모두 고통당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저 멀리 구름 같은 이야기, 그저 배워온 논리에 따라 말할 뿐입니다. 그들은 이론가일 뿐입니다. 그러나 욥은 인간적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고통이라 말하고, 부당하게 느끼는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며 하느님을 찾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한 이는 이론가들이 아니라 욥이었습니다. 고통의 이유, 의인과 악인의 삶의 반전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우리의 지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통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의 이유, 원인을 찾아 설명하려 들기보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곁에 있어주려는 실천을 우선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주님께 부르짖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몫입니다. [2019년 6월 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의정부주보 5-6면,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선교사목국 성서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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