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반항의 역사(Eine Geschichte des Widerwillens) 여러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곧 고대 세계의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데 열성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시리아, 바빌론, 가나안,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들의 신에게 기꺼이 기도하고, 예전부터 내려오던 제물을 앞다투어 바치며, 종교적 축제들을 흥겹게 거행합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신들과 화합하는 가운데 삶을 이어갔습니다. 불평하는 하느님 백성 하지만 그와 달리, 선택된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하느님을 향해 들고 일어나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거역하는 반역의 역사가 자주 언급됩니다. 하느님 백성은 걸핏하면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이집트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파라오의 권력에서 벗어난 직후에 얼마 못 가서 곧바로 불평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탈출 16,2-8 참조). 백성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나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예언자들을 향해서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끊임없이 나라 곳곳에 갖가지 우상을 세웁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이 신들을 섬기는 것과 비슷하게 자신들도 하느님을 그렇게 섬기고 싶어 합니다(에제 20,32 참조). 하느님 백성 역시 다른 민족들과 똑같아지고 싶은 것입니다(1사무 8,5.20 참조). 하나같이 하느님을 거슬러 들고 일어나고 불충하고 목이 뻣뻣한 반역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에제키엘서 20장의 긴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를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몸소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당신의 길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시는 가운데, 거듭 이런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반항하였다.”(에제 20,8.13.21 참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스라엘이야말로 세상의 다른 민족들보다도 더 악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덜 경건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타락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핵심은 전혀 다른 데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의 본질은 인간이 세상의 경이로운 힘들을 우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성, 권력, 돈, 자연의 힘, 고향, 조국, 심지어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그 모든 것을 신격화하고 절대화하고 거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권력의 남신들과 사랑의 여신들을 섬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기꺼이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성향이고, 심지어 인간은 거기서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에로스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와 달리,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에서 참하느님과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빨리, 이 하느님의 뜻이 인간이 기꺼이 원하는 바와는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분의 뜻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자주 우리 인간의 계획과 생각, 뜻과는 정반대편에 서는 분이셨고, 우리 안에 깊숙이 살처럼 굳어버린 인간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가는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자신의 온 역사에 걸쳐 늘 하느님의 뜻과 씨름합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거슬러 반항하고, 다른 민족들과 똑같이 되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늘 거듭해서 하느님에게서 떨어져나가고, 늘 끊임없이 불평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이 자신들의 뜻보다 더 유익하고 더 합리적이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알아챕니다. 세상의 신들을 쫓는 것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압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글로 기록하여 늘 눈앞에 두고 새기려는 거대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구약의 율법, 곧 토라는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수백 년에 걸쳐 작업한 엄청난 시도로서,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참된 뜻과 영원히 혼인을 맺는다는 증표였습니다. 하지만 이도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를 참담한 광경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이 돌로 된 증언판에 새겨지는 그 순간에, 백성은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그 앞에서 춤추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다른 종교들이 신들을 섬기듯 그렇게 자신들도 하느님을 섬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계속 자신들의 뜻대로 살고,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힘의 정치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거대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마치 맷돌에 끼어 갈리는 신세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유배가 닥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도 하느님을 거스르는 똑같은 반항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서 나의 주님이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처럼 불평하고, 광야의 하느님 백성마냥 똑같이 죄를 짓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바오로 사도가 괜히 자신의 공동체들을 훈계한 게 아닙니다. 그는 일찍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코린토 공동체도 똑같이 반항하고 투덜거린다고 나무랍니다(1코린 10,1-10 참조).
에제키엘의 환시 에제키엘은 유배 당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간 예언자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도대체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깊이 숙고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놀라운 환시를 체험합니다. 그의 고민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지요. 인간이 ‘자기 자신의’ 관심사들을 추구하는 바로 그 열정으로 똑같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계획들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바로 그 기쁨으로 하느님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그런 일들은 전혀 불가능하기만한 것일까요?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뜻이 외부에서 인간에게 들이닥치기보다는 인간의 마음 안에 살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에 이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의 뜻이 자기 자신의 뜻이 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그 뜻이 인간 자신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에제키엘은 인간이 그렇게 되도록 생겨 먹은 존재가 아님을 잘 압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실현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꿈을 쫓는 데만 열중하는 게 인간입니다. 하느님의 것과 관련되면, 인간은 행여 자신의 자유를 잃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런 와중에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놀라운 깨달음이 덮칩니다. 곧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그분에게는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인간 안에 불어넣으시어 인간의 돌 심장을 살로 된 심장으로 바꾸시고, 그리하여 인간이 진정으로 열정과 기쁨을 다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것만을 자신도 원하게 되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이런 깨달음은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엄청난 환시로 밀려옵니다. ‘맞아, 어찌 그게 불가능하단 말인가! 언젠가는 참으로 그렇게 될 거야! 반드시 그렇게 될 날이 올 거야! 그 날이 오면, 하느님의 영이 인간을 새롭게 하고, 전과는 다른 마음을 인간에게 심어 줄 거야!’ 에제키엘 예언자의 이러한 환시를 에제키엘서 36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에제 36,26-28)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기쁨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예수님에게서 충만히 실현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살아간 첫 인간으로 묘사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분의 양식입니다(요한 4,34 참조). 사도행전에 따르면, 교회의 성립이야말로 예언자들이 염원했던 하느님 영의 종말론적 도래가 이루어진 사건입니다(사도 2,17-21 참조). 마음을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영이 모두에게 내린 것입니다. 갓 태어난 교회는 그저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강림절의 본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씨름하는 오랜 반항의 역사 한가운데서 이제 처음으로, 온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함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 바로 열정과 기쁨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신 하느님의 영, 바로 우리를 도우시고 생생하게 만드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 영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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