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되찾은 양의 비유
교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우리에게 노동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박노해 시인의 ‘나 거기 서 있다’라는 시를 읽습니다.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아픈 곳이 중심이 된다 가족의 중심은 아빠가 아니다 아픈 사람이 가족의 중심이 된다 총구 앞에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양심과 정의와 아이들이 학살되는 곳 이 순간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이하 생략)* * 박노해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느린걸음, 2010, p327. 한때 서슬이 퍼렇던 독재 치하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을 시로써 대변하던 박노해 시인. 지금은 가난과 분쟁이 있는 지구촌 곳곳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시를 쓰며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지요.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 인간의 탐욕 아래 가난한 이들, 약한 이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인류의 고통과 슬픔이 있는 현장에서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교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교회의 중심은 사제도, 주교도, 교황도 아닌, 바로 어린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곳,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 가난한 이들의 자리, 그곳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내면의 대답을 듣습니다. 교회가 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세상 속 시류에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복음은 세리와 죄인, 온갖 병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착한 목자가 찾아 나서는 곳 그것이 교회의 중심이고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착한 목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구약에서 목자의 표상은 하느님의 모습을 그릴 때(시편 23,1; 이사 40,11; 예레 31,10 참조) 적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메시아 임금에게(시편 78,70-72; 에제 37,24 참조) 또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예레 2,8; 10,21; 23,1-8 참조) 적용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으로 보면 목자는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드러내거나 임금이나 지도자로서의 명예로운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드러난 목자의 표상과는 달리, 예수님 시대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목자는 사실 척박한 땅에서 목초지를 찾아 양 떼와 함께 떠돌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양들을 지키고 돌보는 비천하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에서 정한 음식을 먹기 전 손 씻는 예절도,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것도, 정기적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엄격한 유다교의 종교적 사회 분위기 안에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목자들은 당연히 멸시받는 신분이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안에서 예수님 당신 자신을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라고 하신 것은 양들과 함께하는 비천한 목자의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착한 목자’에서 ‘착한’은 ‘아름다운’의 의미를 가진 희랍어 καλός(kalos 카로스)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희랍에서 ‘착한(good)’은 윤리적인 의미로 ἀγαθός(agathos 아가토스)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로스’는 윤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 ‘모델(model)’이 되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저 착하신 분이 아니라 몸소 삶의 모범이 되시는 ‘모델 목자(Model Shepherd)’1)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푸른 풀밭과 물가로 인도하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을 정도로 양들과 한 몸처럼 동고동락하며 지냅니다. 비록 안식일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는 멸시받는 신분으로 취급받을지라도 자신의 양들을 돌보고 양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주며 마침내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주시며,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 고발하려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반문하시는 것처럼(마르 3,1-6 참조) 착한 목자의 표상은 그 어떤 종교적 규범이나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 바로 고통 중에 있는 그 사람,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에 그의 몸과 마음이 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복음 속 착한 목자의 이미지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 같습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백 마리 중 한 마리에 불과합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문제없는 양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양 한 마리쯤은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계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셈법은 다른 차원의 목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의 생활상은 수직적 위계구조가 강했습니다. 제자들이 가끔씩 예수님께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고 질문하는 것을 보아도 이 시대가 얼마나 신분에 따른 수직적 구조가 강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수직적 신분구조가 강한 사회란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하층민들은 더 심한 차별과 소외를 겪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리와 죄인, 장애인,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잉여처럼 취급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찾으러 왔다고 하십니다. 언젠가 신자 한 분이 저에게 건넨 충고 말씀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사제가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면 부자도 이해할 수 있지만, 부자를 이해하면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정말 가난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부자의 영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부자들과 어울린다고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과 함께할 때 부자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한 신자가 던져준 이 짧은 메시지 안에 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하셨는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산에 남겨 둔 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시는지에 대한 대답이 모두 들어 있어 보입니다. 목자의 마음 안에 부자들만 있다면 사실은 부자도 없고 가난한 이들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자의 마음을 가난한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가난한 이만이 아니라 부자도 함께 있게 됩니다. 한 마리 양을 포기하는 목자의 마음 안에는 사실 아흔아홉 마리 양도 없지만,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 안에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도 함께 있습니다. 양 한 마리 한 마리가 목자에게는 전부처럼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제로 살아가며 본당에서 단체를 활성화시키고 전례나 행사를 멋지게 하여 본당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 병자들과 고통받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시고 손을 얹어 치유해주시는 것처럼, 슬픔과 고통이 있는 자리에서 단 한 사람의 손이라도 따뜻하게 잡아주는 그 사랑 안에 사제직의 모든 해답이 있음을 느낍니다. 서두에 몸의 중심은 심장이 아니라 아픈 곳이 중심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그 아픈 부분이 교회의 중심입니다. 예수 성심 성월에 착한 목자이신 주님 마음을 묵상하며 우리도 새롭게 그 중심을 잡아야 하겠습니다. 1) Msgr. Michael J. Cantley, 『The Enchantment of the Parables』, St. Paul, 2010, 8 참조.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생활성서, 2019년 6월호,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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