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위원의 사도행전 이야기] (23)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사도 8,26-40)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여 구원의 기쁨 얻다 - 필리포스의 복음 선포 여정. 예루살렘 북쪽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한 필리포스의 복음 선포 활동이 계속 이어집니다.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시종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후에 지중해 연안 일대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일곱 봉사자 중 한 사람인 필리포스가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로 간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시종을 만나게 된 것은 ‘주님의 천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라. 그것은 외딴길이다”(8,26)라고 알려줬습니다. 가자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의 중심 도시 가자를 말합니다.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가자로 내려가는 길이 남쪽이라고 하지만 가자는 예루살렘에서 서남쪽으로 70㎞가량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입니다. 가자는 본래 구약에 나오는 필리스티아인들의 도시였습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라틴어로 팔레스티나)이라고 부르는 지명이 바로 이 필리스티아에서 나왔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가자, 아스돗, 아스클론, 갓, 에크론 이 다섯 도시가 필리스티아인들의 중심 도시였습니다.(여호 13,3 참조) 주님의 천사 말에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필리포스에게 수레에 바짝 다가서라고 이르십니다.(8,27-29) ‘칸다케’는 여왕의 이름이 아니라 이집트 왕을 가리키는 ‘파라오’나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카이사르’처럼 에티오피아 여왕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나일강 상류 청나일강의 발원지가 있는 나라입니다.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가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러 예루살렘을 다녀갈 뿐 아니라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는 것은 아프리카 땅 에티오피아에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대한 신앙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이집트뿐 아니라 에티오피아에서도 디아스포라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한 스바니아 예언자가 “에티오피아 강 너머에서 나의 숭배자들, 흩어진 이들이 선물을 가지고 나에게 오리라”(스바 3,10)고 예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지시에 따라 필리포스가 달려가 보니 그 내시는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가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누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며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합니다. 내시가 읽던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 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8,30-33) 이사야서 53장 7-8절을 인용한 이 성경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시로서는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필리포스에게 이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알려 달라고 청합니다.(8,34)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8,35) 이 대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고 한 루카 복음 24장 27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설명하신 것을 이제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에게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이 불타올랐듯이(루카 24,32), 내시가 필리포스의 설명을 들었을 때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물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내시는 필리포스에게 말합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고,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세례를 줍니다.(8,36-38) 그런데 성경 본문에는 8장 37절이 빠져 있습니다. 각주에 보면 37절에 “‘마음을 다하여 믿으시면 받을 수 있습니다” 하고 필리포스가 대답하자 “‘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그가 말하였다”라는 부분이 특히 2세기 이후에 서방에서 손으로 베껴 쓴 사본들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세례 예식 때에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전례문이라고 학자들은 해석합니다.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세례를 받고 두 사람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8,39ㄱ)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필리포스가 내시에게서 갑자기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이 표현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는 루카복음의 구절(루카 24,31)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표현은 또한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설명하고 세례를 준 것이 모두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8,39ㄴ)고 사도행전 저자는 전합니다. 사마리아의 고을이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을 보고 구원이 기쁨에 넘쳤듯이, 내시는 필리포스에게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아 구원의 기쁨으로 제 길을 갑니다. 사도행전의 이 이야기는 필리포스가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8,40) 서술로 마무리됩니다. 아스돗은 가자 북쪽에 있는 해안 도시이고, 카이사리아는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역시 해안 도시로, 필리포스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일곱 봉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필리포스는 카이사리아에 집이 있고 네 딸을 둔 가장이기도 합니다.(사도 21,8-9) 생각해봅시다 필리포스와 에티오피아 내시 이야기는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우선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준 필리포스는 성령께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께 열려 있었기에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팔레스티나의 해안 지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복음 선포자는 성령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에티오피아의 고관 내시는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온 유다인인지 아니면 이방인으로서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필리포스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아 구원의 기쁨을 안고 제 갈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 선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에티오피아 고관 내시는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7월 7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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