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다시 읽기] 새 성전에서 새롭게 싹튼 메시아 대망(待望) “나는 동정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 안에 나의 집이 다시 지어지리라. 주님이 시온을 다시 위로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리라.”(즈카 1,16-17 참조) 성전 짓는 동기(同期)들, 고달픔 속 행복 동기 신부 열넷 중에 교구 내 본당에서 사목하는 이가 두 사람입니다. 둘다 건립기금을 모으고 성전을 짓는데 열심입니다. 동기 모임 때면 “힘들지?”, “아이고, 고생이 많구만.” 다들 한마디씩 거드는데, 정작 본인들은 불평 한마디 않습니다. 여기저기 모금하러 다닌 이야기, 교우들과 함께 기금 마련 행사를 치른 이야기, 때로는 좀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에는 교우들과 함께할 성전을 짓겠다는 희망이 가득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 성전이 지어지기까지 모여 가는 것은 기금만이 아니라 교우들의 믿음과 하느님의 집에 대한 애정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지요. 혹자는 ‘신자 수도 줄어가는데 왜 자꾸 성당을 짓나?’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고민해 볼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지금 당장 성전이 없어서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리고 교우들 간에 친교를 나누고 우리 아이들이 교리를 공부할 보금자리를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쉽게 할 말은 아닐 테지요. 성전을 짓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졌던 과업이었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재건했던 이야기와 당시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유배 후 성전 재건, 희망의 시작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가 유배 와 있던 각국의 백성들을 제 고향으로 돌려보냈던 이유에 관해 실제 비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자신들의 거룩한 도성에 다시 정착하게 한 모든 신들이 벨과 느보(페르시아의 신들)에게 나의 장수를 매일 청하고, 마르둑에게 나에 관해 좋게 말해주길 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으로 키루스의 말을 이렇게 옮깁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2역대 36,23; 에즈 1,2) 유배에서 돌아온 즈루빠벨 총독(다윗 왕실의 후손)과 예수아 대사제는 이듬해(기원전 537년) 즉시 성전을 짓기 시작했지만 사마리아인들의 방해와 모함으로 공사가 강제로 중지되었습니다. 이후 열일곱 해가 지나도록 성전 공사에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처음에는 페르시아 중앙정부의 제지 때문이었지만 차차 백성들 안에 번져가는 나태함과 이기심이 더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뭐 당장 있어야 하나? 나 살기도 팍팍한데.’ 하며 성전 짓는 일을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때였지요.(하까 1,2) 마침내 기원전 520년,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성읍과 성전 재건을 시작하도록 하까이와 즈카르야 두 예언자들을 뽑아 세우셨습니다. 이들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은 두 가지 주제로 요약되는데, 바로 ‘성전 건축’과 ‘메시아 대망(待望)’이었습니다. 하까이와 즈카르야는 무너진 자존감과 무기력함 속에 빠져 있던 백성을 다시 일으켜, 그들이 성전을 다시 짓고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도록 용기를 북돋우었습니다. 하까이 예언자 과거 다윗에게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어찌하여 나에게 향백나무 집을 지어 주지 않느냐고 내가 한마디라도 말한 적이 있느냐?”라고 하셨던 하느님(2사무 7,5-7 참조), 또 예언자들을 통해 성전 전례를 강하게 거부하셨던 그분께서(이사 1,11-15; 예레 7장; 호세 4,4; 아모 5,21-23) 왜 이제는 당신이 먼저 나서서 성전을 지으라 하신 걸까요? 그 해답을 하까이 예언자의 이름에서 찾아봅니다. 하까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축제”, 곧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전례 축제들을 떠올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배에서 돌아온 백성이 이제 다시 올바른 경신례를 드리길 원하셨습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하까 1,4)라고 하신 하느님 말씀은 내게도 집을 지어달라는 단순한 투정(?)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전과 예배가 아닌 엉뚱한 데에서 미래를 찾고 당장 자기 살길만 궁리하는 백성에게 그런 삶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가르치시고(1,5-6.9-11) 당신께서 현존하시는 성전을 통하여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2,4-9.15-19) 온통 세상에만 시선이 빼앗겨 성전과 전례에서 자꾸만 멀어져가는 우리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과 또 그들을 붙잡지 못하는 우리들이 꼭 되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몸은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마음은 아직 하느님께로 온전히 향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건축은 그분께 대한 믿음을 모으고 축복의 통로를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은 결국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일로서, 구원의 조건이었던 것이지요. 한편 하까이 예언자는 새로 지어질 성전으로부터 종말론적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선포하면서(2,5-9) 성전을 지을 주인공인 즈루빠벨을 주님의 선택받은 이로 예찬합니다.(2,20,-23) 즈루빠벨(히브리어로 “바빌론의 씨앗”)은 이름 그대로 바빌론 유배지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유다 가문 여호야킨 임금의 손자였는데, 페르시아 임금이 유다 지방 행정관으로 임명하여 유다 땅을 다스리게 한 사람입니다. 하까이는 즈루빠벨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세상 왕국들과 권세를 꺾으시고 새로운 구원의 시대, 곧 메시아의 종말론적 왕국을 여실 것이라 선포하였습니다. 이 구원의 예언이 유다 총독 즈루빠벨을 넘어서,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성취되었음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즈카르야 예언자 당신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촉구하고 종말에 관한 말씀을 전하시려 하느님께서 세우셨던 또 한 분의 예언자는 즈카르야입니다.(기원전 520-518년 활동) 흔히 학자들은 즈카르야서를 제1즈카르야서(1-8장)와 제2즈카르야서(9-14장)로 나누는데, 저자도 다르고 내용과 문체도 서로 달라 그렇습니다. 제1즈카르야서는 하까이와 동시대를 살았던 즈카르야 예언자의 저작으로 주로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의 복구’에 대해 말하는 반면, 제2즈카르야서는 훨씬 후대인 그리스 시대(기원전 4-3세기)의 작품으로서 성전 복구보다는 주로 ‘세상에 임박한 종말’에 관해 선포합니다. 유배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정치, 경제, 종교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여전히 황폐했습니다. 유배 전 찬란했던 왕국시대에 비하면 인구도 적고 당연히 거두어 들이는 소출 또한 미미했던 때였지요. 유배 중 예언자들(제2이사야, 에제키엘)이 예고했던 평화와 풍요가 넘치는 메시아의 시대가 이제는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지던 무렵, 약하고 어리석은 이 백성이 어찌 지쳐 낙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모두가 하느님의 집을 잊어버리고 일상에만 몰두하던 그때, 즈카르야 예언자는 ‘조상들의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구원의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너희는 나에게 돌아와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즈카 1,2-3) 이어지는 여덟 개의 환시와 그 사이에 자리잡은 신탁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시고, 새로운 성전과 메시아를 통하여 구원의 시대를 새롭게 열어 주시리라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덟 개의 환시는 (1) 여러 색깔의 말들과 도금양 나무 (2) 뿔들과 대장장이 (3) 측량줄 (4) 예수아 대사제와 더러운 옷, 사탄과 천사 (5) 등잔대와 두 올리브 나무 (6) 하늘을 날아다니는 큰 두루마리 (7) 뒤주 속 여자(‘악’)와 날개 달린 여자들 (8) 병거들과 청동 산 등 수수께끼 같은 여러 형상들로 가득합니다만, 각 환시 때마다 이어서 그 의미를 친절하게 풀이해주는 천사의 말에 우리도 즈카르야 예언자처럼 귀기울여 보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즈카르야 예언자는 ‘참된 단식’에 관해 가르치고(7장), 마지막으로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약속합니다.(8장)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용기를 북돋우십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너희는 복이 되리라.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어라.”(8,13) 메시아 시대의 약속 하까이 예언자는 다윗의 후손인 유다 총독 즈루빠벨에게 말합니다. “나의 종 즈루빠벨아, 내가 너를 받아들여 너를 인장 반지처럼 만들리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기 때문이다.”(2,23) 즈카르야 예언자 또한 이 즈루빠벨을 메시아의 전형적인 칭호 “새싹”(3,8)과 “성별된 이”(4,14)로 칭하시는 주님 말씀을 전합니다. 유배에서 돌아와 원수들의 공격과 박해를 이겨내고 기어이 성전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다스림을 가져온 다윗의 후손 즈루빠벨이야말로 메시아로 불리기에 참으로 적격이었지요. 그러나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 모두 세상을 떠나고 메시아를 통한 세상의 완성과 구원이 미루어지면서 이 두 사람에게 걸었던 희망은 자연스레 ‘장차 오실 메시아’ 대망(待望)으로 옮아 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향한 백성의 이러한 간절한 기다림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지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마태 21,5; 요한 12,15)이야말로 이미 수백 년 전 즈카르야가 예언했던 메시아의 도래 장면 그대로였습니다.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그뿐만이 아닙니다. “칼아, 나의 목자를 거슬러, 내 동료를 거슬러 깨어 일어나라. 너는 목자를 쳐서 양 떼가 흩어지게 하여라.”(즈카 13,7) 했던 즈카르야의 예언은 예수님께서 칼과 몽둥이를 든 이들에게 체포되어 잡혀가시고 제자들이 흩어져 도망치던 그 밤 성취되었지요.(마태 26,31; 마르 14,27)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찔러 죽인 이’를 바라보며 죄를 뉘우치게 하시리라는 즈카르야의 예언(즈카 12,10) 역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옆구리를 군사 하나가 창으로 찌름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요한 19,37)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신 메시아, 참 목자가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수난하고 죽음으로써 온 백성을 구원하고 온 세상 만민이 하느님께로 모여와 그분을 섬기게 된다는 즈카르야의 예언들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롯이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성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곳 얼마 전, 신학교 성김대건기념관에서 교구 행사가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탓에 책도 손에 잘 안 잡히고 해서 잠시 나가 보았지요. 마침 기념관 입구에 천막을 쳐 놓고 도시락과 커피를 팔면서 참 행복해하는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성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온 분들이었지요. 한 주 내내 참 힘들었을 텐데, 무더운 주일 아침부터 나와 그 고생을 하면서도 무엇이 그리 기쁘고 행복해서 웃음꽃을 피우며 신나게 일하고 있었을까요? 자신들의 삶의 터전 한가운데 성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형제자매들과 친교를 나누고 우리 아이들이 믿음을 전해 받고 키워 갈 구원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리라는 벅찬 희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무너진 도성과 파괴된 성전, 황폐해진 농토와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버린 혈통,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이는 절대적 절망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하느님의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은 그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죄 많고 부당한 인간이 언제라도 하느님의 현존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곳,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의 장소가 되어 주었고, 바로 그 성전으로부터 죄인들과 그들의 가족들과 온 백성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전에 빈자리가 늘어간다고 걱정을 하십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성전은 ‘우리가 채워야 하는 공간’이라기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과 은총으로 채워주신 공간’, ‘그렇게 우리를 만나시려 열어놓으신 축복의 자리’라는 사실에 용기가 납니다. 곳곳에 세워진 하느님의 성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명백한 표징이니까요. 성전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기쁨과 희망으로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그분의 구원을 약속받은 소중한 이들임을 알게 되어 자기들도 우리와 함께하고픈 기대를 품게 되길 희망합니다. 성전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영원히 함께 머무르겠다 하신 하느님의 약속을 새삼 떠올려 봅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에제 37,26-27) [월간빛, 2019년 7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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