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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들음과 행함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7-11 조회수6,907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들음과 행함(Hören und Tun)

 

 

루카 복음사가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여러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우리를 매번 거듭 놀라게 합니다. 물론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 머리말에서,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고 말합니다(루카 1,3 참조). 그 이야기 가운데, 곧 믿을 만한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루카 1,2)에게서 루카가 전해 받은 루카 복음서만의 고유한 이야기 가운데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10, 38-42). 연중 제16주일(다해) 미사에서 봉독되는 이 이야기에서, 마르타는 마침 길을 가다가 그 마을에 들어오신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입니다. 루카는 탁월한 이야기꾼답게 짧지만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구성으로 이 이야기를 우리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 보입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예수님은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서 아마도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 중이었겠지요. 그분 주위로 제자들과 이웃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 말씀을 듣는 데만 정신이 팔려 다른 것은 새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르타는 마리아와 아주 대조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마르타는 손님들에게 시중드는 일에 온갖 애를 다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르타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갑자기 집에 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그밖에도 할 일이 많았겠지요.

 

우리는 마르타가 얼마나 분주한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르타는 자기 생각에 모든 것을 제대로 통제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혼란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동분서주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르타에게는, 자신을 돕는 데에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마리아가 고운 눈으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마침내 어느 순간 마르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속에서부터 폭발한 것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 앞에 가서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물론 마르타는 조금은 완곡하게 경건한 말투로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주님은 보고만 계시냐고 말함으로써 마르타는 공개적으로 동생만을 나무란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은근히 핀잔을 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타 앞에서 마리아를 옹호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교회 역사 안에서


교회 역사 안에서 루카 복음서의 이 이야기는 처음 수백 년 동안 깊은 숙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서로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곧 마르타는 활발하고 활동적인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마리아는 고요하고 명상적인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해석에 따르면, 분주한 세상일에서 떠나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 삶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 곁에 온전히 머무르는 것, 그렇게 하느님의 현존으로 온통 자신의 영혼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더 나은 몫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위한 활동적인 사명들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루카 복음서의 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는 일이 어쩌면 더 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아니었을까요? 순례 길을 조성하고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노인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이 온종일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묵상하는 일보다 어쩌면 더 복음적인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활발하고 활동적인 삶과 고요하고 명상적인 삶이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고대 교회는 물론 중세 교회에서도 이 문제는 엄청난 고민거리였습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는 명목으로, 물론 이는 잘못된 믿음이었지만, 손에 칼을 들고 길을 나선 기사 수도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온전히 수도원 깊은 곳으로 물러나 명상의 삶을 추구한 수도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변혁하려는 노력과 하느님 찬미를 균형 있게 연결시키려는 수도회들도 생겨났습니다.

 

 

기도할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


이 주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늘 새로운 모습으로 이 오랜 문제가 거듭 떠오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굶주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배불리 먹여주시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아니면 기도하는 대신에 우리 스스로 행동해야 할까요? 물론 이런 식으로 문제를 계속 한쪽으로 몰고 가다 보면, 무엇인가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금세 알아차립니다.

 

곧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가 사실은 더 큰 맥락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에서 종결부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는 서막 격인 루카 복음서 10장 23-24절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향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옛 약속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와 임금들이 고대했지만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 곧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새 가족이,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새 사회가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지금 새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더 큰 맥락에서 이어지는 이 이야기의 종결부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보고’ ‘듣습니다’. 곧 루카는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복되다고 하신 말씀을 잘 이해하고 이를 실행한 예수님의 제자로 마리아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보고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로써 행함이라는 것은 뒤로 밀려나고 폄하된 것일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루카는 큰 그림으로 구성한 이 이야기에서 서막과 종결부 사이에 또 하나의 긴 이야기를 중간부로 끼워 넣습니다.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루카 10,25-37 참조).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 그 상처를 싸맨 다음 그를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 돌보아주면서 비용까지 지불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못 본 체 지나가버리지요. 성전 예배에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려면 정결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이야기는 올바른 실행에 관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바로 이렇게 끝맺고 있지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그러니 세 부분으로 구성된 이야기 전체는 올바른 실행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올바른 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는 먼저 보고 들어야 합니다. 세상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 한가운데 이미 시작된 새것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위기를 찾아내고 올바른 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상황

 

제가 사는 이곳 독일에는 현재 교회의 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교회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는 자신이 제시하는 윤리적 요구들을 재고해야 하고, 철 지난 전통들은 과감히 없애야 하고, 그릇된 구조들은 바꾸어야 하고, ‘이것’을 또는 ‘저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부분에서’ 아니면 ‘저 부분에서’ 이제는 행동해야 하는 때이고,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해야 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주장들은 대부분 교회가 세상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가 보기에, 자신들이 나서서 교회를 구해야만 한다고 확신하는 이 단체들이 빠져드는 근본적인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곧 그들은 먼저 복음을 바탕으로 무엇이 절박한지 묻지 않고, 사회적 사고방식에 따라 묻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그 복된 시간에 했던 것, 바로 그것을 하지 않습니다.

 

‘들음과 행함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올바른 행동은 거의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교회는 당연히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고, 우리 역시 모두 늘 새롭게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이스라엘 역사에서 행하신 하느님의 행동과 예수님의 행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러기 위해 시간을 낼 때만 가능합니다.

 

간단히 말해, 교회는 늘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이들을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그 무엇보다도 절박하게 그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행동은 거의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들음과 행함은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마르타에게서 배울 수 있고, 마르타 역시 자매인 마리아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7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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