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민수기 I 오경의 네 번째 책인 민수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그 이듬해 둘째 달 초하룻날, 주님께서 시나이 광야에 있는 만남의 천막에서 모세에게 이르셨다”(민수 1,1).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만남의 천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탈출기 19장에서 시작하여 레위기를 거쳐서 아직 시나이 산에 머물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만남의 천막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어지는 장소의 연속성은 민수기와 탈출기와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나이산에서 마무리되는 레위기와의 연속성도 민수기는 보여줍니다(참조: 레위 27,34). 민수기는 히브리어로 “그분께서 말씀하셨다(וידבר)”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시작합니다. 하지만, 레위기의 제목은 첫 단어가 아닌, ‘광야에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베미드바르(במדבר)’로 불립니다. 왜 이렇게 제목을 정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는 민수기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가 광야라는 특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는 시나이산의 만남의 천막에서 시작되지만, 10장 11절 부터 시나이산을 떠나서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둔 모압 벌판까지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탈출기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산에 도착한 광야의 여정을 보여주고, 민수기는 시나이산에서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두 단어 “וידבר”와 “במדבר”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이라는 의미를 지닌 ‘다바르(דבר)’입니다. 광야와 말씀.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약속의 땅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보여주는 광야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주는 하느님 말씀이 바로 민수기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을 히브리어 제목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민수기’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그 시작은 바로 칠십인역 성경이 민수기 책을 그리스어로 ‘수(數)’ 또는 ‘수(數)를 세다’ 라는 의미를 지닌 ‘아리스모이(Άριθμοι)’라고 지칭한 데서 유래합니다. 이는 아마도 민수기 전체 구성이 수(數)라는 외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는 인구조사 이야기로 시작되어 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스라엘 지파의 병력수(1,20-47), 레위 지파의 인원수(3,14-51)와 복무 기간(4,3; 8,24), 봉헌물의 양과 수(7,10-88), 정화를 위해 요구되는 일수(19,12) 두 번째 이스라엘 지파의 병력수(26,5-51), 축제일과 축제에 바칠 봉헌물의 일람표 및 봉헌물의 분량(28,1-29,39), 미디안 전쟁의 전리품과 그 분량(31,32-52). 이처럼 오경의 네 번째 책은 숫자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지닙니다. ‘민수기(民數記)’라는 우리말 성경의 제목도 수(數)에 집중합니다만, 특히 두 번에 걸쳐 진행한 인구조사에서 좀 더 집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민수기의 전체 구조는 장소에 따라서 구분하면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나이 체류의 마무리(민수 1,1-10,10), 시나이산에서 모압 벌판을 향한 여정(10,11-21,35), 모압에서의 체류(22,1-36,13)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탈출기가 ‘이집트 → 광야 → 시나이산’을 향한 움직임을 알려준다면, 민수기는 ‘시나이산 → 광야 → 모압(약속의 땅 건너편)’을 향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백성의 이동 경로에 따라서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해가 한결 수월합니다. 이 여정이 보여주듯이 약속의 땅이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그 멀고 험한 여정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이어갑니다. 탈출기는 이집트를 탈출한 인원에 대하여 “장정만도 육십만 가량”(탈출 12,37)이라고 알려줍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집트를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약속의 땅에 들어간 사람은 단 두 명,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푼네의 아들 칼렙뿐이었습니다(민수 14,30).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한 답을 민수기는 제공해 줍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여호수아와 칼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유일한 탈출 세대가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이끄심과 약속의 땅이라는 큰 꿈을 안고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 탈출의 첫 세대의 마지막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민수기 II 민수기는 수(數)와 관련된 책입니다. 수에 관한 많은 언급이 나오지만, 가장 중요한 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입니다. 인구 조사는 민수기의 처음과 중반 이후에 두 번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첫 번째 인구 조사에 의하면 전투에 나설 수 있는 남성만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고(민수 1,46), 두 번째 인구 조사에서는 육십만 천칠백삼십 명이었습니다(26,51). 두 번의 인구 조사는 민수기 내용을 구성하는 중요한 테두리입니다. 인구 조사를 통해서 이집트 탈출 세대와 탈출 이후 세대를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탈출 세대의 이야기는 민수기 25장까지 이어집니다. 26장에서 언급되는 두 번째 인구 조사는 탈출 이후 세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인구 조사 이후에 이러한 구절이 언급됩니다: “이들 가운데에서 모세와 아론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열할 때, 그 사열을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두고 ‘그들은 반드시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말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26,64-65). 이처럼 민수기는 인구 조사라는 틀을 이용하여 이집트 탈출 세대와 탈출 이후 세대를 구별합니다. 그렇다면, 탈출 세대는 무엇 때문에 광야에서 죽게 된 것일까요? 민수기 11장에서는 만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기억나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갈대 바다를 건너고 난 후에 먹을 것이 없어 투덜거리자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내려 주신 이야기를(탈출 16장 참조). 하지만, 민수기는 만나를 지겨워하면서 투정부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전에는 배고픔에 투덜거리더니, 계약을 맺은 이후에는 만나 그 자체에 불평을 토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태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민수기 13장은 가나안 땅을 살펴보는 정찰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십 일 동안 정찰을 하고 돌아온 정찰대는 그 땅에 사는 백성이 힘세고 거창한 성채로 무장이 되었다며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정찰대원 칼렙과 여호수아는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요. 그렇다면,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하다는 의견에 동조하면서 주님께 원망하면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을 칩니다(민수 14장 참조). 이에 하느님께서 격노하시면서 칼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는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십니다(14,29 참조). 또한 사십 일의 정찰 기간에서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하여 사십 년 동안 죗값을 치러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14,34 참조). 광야에서 사십 년 시간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게다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물 부족을 호소합니다(20,1-13). 바로 ‘므리바’라는 장소에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치면 물이 나올 것이라고 알려주시는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모세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20,12). 광야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잘못은 민수기 25장에서 들려주는 프오르의 바알 숭배 사건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진노케 하였고, 광야에서 황금 송아지 사건을 떠오르게 만드는 우상숭배 사건이었습니다. 우상숭배에 연루된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로써 탈출 세대는 그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야의 여정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께 불평합니다. 투덜거립니다. 그러면서 과거 이집트 생활을 다시금 회상합니다. 분명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 백성이 된 그들이었지만, 현실적 어려움은 그들을 다시 노예시절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중요성,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불신은 한 번이 아니라, 만나, 물, 우상숭배, 그리고 궁극적으로 약속의 땅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면서 하느님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전한 신뢰와 믿음을 지닌 백성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그룹에 속해 있나요? 불신의 그룹? 아니면 신뢰와 신앙의 그룹? 선택은 온전하게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2019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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