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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묵시록 해설] 7장 ---송영진 모세 신부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2-11-05 조회수574 추천수1

<요한 묵시록 7장>

 

7장

 

 

 

 

    7장은 여섯 번째 봉인과 일곱 번째 봉인 사이의 보충계시입니다.

    앞의 6장 17절에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 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질문은 아무

    도 견디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7장에서는 ''견디어 낸

    사람들'', 즉 구원받을 사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1절-8절 :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1절..<그다음에 나는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서는 땅에도

    바다에도 그 어떤 나무에도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유대인들은 지

    구를 네모 모양의 평원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땅의 각 변에서 부는 바람은 유익한 바

    람이고, 각 모서리(모퉁이)에서 부는 바람은 유해한 바람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바람과 바다를 두려워했습니다.

    ''네 천사''는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바람으로 세상을 휩쓸어 버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천사들입니다. ''땅의 네 바람''은 모퉁이에서 부는 해로운 바람입니다.

    ''땅''과 ''바다''는 ''온 세상''을 뜻합니다. ''나무''는 인간들을 상징합니다(시편 1,3).

    천사들이 바람을 붙잡고서 불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여섯 번째 봉인과 일곱 번째 봉인 사이

    에서 환난이 일시정지 상태가 된 것을 나타냅니다.

 

2절-3절..(2)<나는 또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땅과 바다를 해칠 권한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한 천사가 나타나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마에 하느님의 도장

    을 찍을 때까지 아무도 해치지 말라고 땅의 네 모퉁이에 있는 천사들에게 명령하고 있

    습니다. ''해 돋는 쪽'', 즉 동쪽은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유대인

    들은 마지막 시기의 낙원이 동쪽에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구원은 동쪽

    에서 온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찍는 것''

    은 에제키엘서 9장 4절에서 온 표현으로, 고대사회에서 가축과 노예들에게 주인이 낙인을

    찍던 관습을 반영한 것입니다. 낙인은 소유권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마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종들''은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인장을 받는다고 해도 재앙이나

    시련이 면제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겨낼 힘을 받게 되고, 악인들이 받을 벌에서 보호받

    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인장을 찍을 때까지 아무도 해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악인들만

    받아야 할 벌을 의인들(하느님의 종들, 구원받을 사람들)도 받게 되는 것을 막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4절..<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

    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인장을 받은 사람들의

    수는 십사만 사천 명입니다. ''십사만 사천''은 12X12X1,000인데 12는 완전함을 상징하고

    1,000은 충만함, 아주 많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12,000과 144,000은 모두 하느님의 구

    원을 얻을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12지파 중,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10지파는 거의 소멸되었고, 남부 유다

    왕국의 두 지파, 즉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늘

    날엔 거의 유다 지파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인장을 받은 이들이 이스라엘

    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는 말은 종말이 되면 12지파가 재건될 것이라고 믿

    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생각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에서 언급하는 12지

    파는 실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5절-8절..(5)<이렇게 인장을 받은 이들은 유다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르우벤 지파에서 만 이

    천 명 가드 지파에서 만 이천 명> (6)<아세르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납탈리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므나쎄 지파에서 만 이천 명> (7)<시메온 지파에서 만 이천 명 레위 지파에서

    만 이천 명 이사카르 지파에서 만 이천 명> (8)<즈불룬 지파에서 만 이천 명 요셉 지파

    에서 만 이천 명이었고 벤야민 지파에서도 만 이천 명이 인장을 받았습니다.>--여기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목록과 순서는 구약성경의 목록과 다릅니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 저

    자가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재구성한 것입니다.

    유다 지파가 맨 먼저 언급된 것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에서 땅을 분배할 때에는 요셉의 두 아들, 므나쎄와 에프라임이 들어갔고 요셉

    과 레위가 빠졌습니다. 원래의 12지파를 언급할 때에는 레위와 요셉이 들어가고 므나쎄와

    에프라임이 빠집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우리가 보고 있는 12지파의 목록에는 레위와 요셉과 므나쎄가 들어

    있고, 단과 에프라임이 없습니다. 이 목록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1) 12지파의 명칭이 당시에는 아직 정확하지 않았다는 가설.

    2) 단 지파가 초대 그리스도교를 심하게 박해했기 때문에, 또는 단 지파에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이단이 나왔기 때문에 그 보복조치로 요한 묵시록 저자가 고의로 단 지파를 삭

    제했을 것이라는 가설.

    3) 원래는 단 지파가 들어 있었는데 후대의 어떤 필사자가 실수로 ''단''을 ''만''으로 썼고,

    그 뒤에 다른 필사자가 ''만''을 발음이 비슷한 ''므나쎄''로 수정했을 것이라는 가설.

    이렇게 세 가지 가설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결론은 없습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12지파의

    목록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144,000이라는 수도, 그리고 12지파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아주 많고 하나의 백성

    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9절-17절 : 선택된 이들의 무리인 교회>

    7장의 전반부(1절-8절)의 144,000명과 후반부(9절-17절)의 군중을 같은 사람들로 볼 것

    인가, 다른 사람들로 볼 것인가?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144,000명을 유다계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해석하고, 후반부의 군중은 이방계 그리스도교 신자들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교회를 그렇게 둘로 구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144,000명과

    12지파가 하나의 상징일 뿐이라면 전반부의 사람들과 후반부의 사람들을 같은 사람들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표현을 다르게 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반부는 전혀 새

    로운 내용이 아니라 전반부를 보충(보완) 설명하는 내용이 됩니다.

 

9절..<그다음에 내가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

    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

    리''는 144,000명을 풀어서 표현한 말로 생각합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세상 모든 곳, 모

    든 나라에서 뽑혔다는 뜻입니다.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있다는 말은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변모된 모습을 하고 있

    었다는 뜻이고, 이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라는 말은 그들이 승리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야자나무''는 ''종려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종려나무를 흔든다는 것은

    승전의 기쁨을 표시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들이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늘나라로 개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구원과 승리가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서 온 것임을 나타냅니다.

 

10절..<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구원은 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느님과 어린양의

    것입니다.">--구원받은 이들이 구원과 승리의 원천은 하느님과 어린양이시라고(하느님과

    어린양에게서 구원과 승리가 온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은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11절-12절..(11)<그러자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가, 어좌 앞

    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느님께 경배하며> (12)<말하였습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

    께 찬미와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영예와 권능과 힘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11절과 12절은 구원받은 사람들과 ''모든 천사들''이 경배와 찬양을 주고받는 내용입

    니다. 5장 12절에서 ''모든 천사들''이 어린양을 찬양했었는데, 지금 여기서는 거의 같은

    말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구원의 원천은 하느님이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13절..<그때에 원로 가운데 하나가,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여기서 원로의 질문은 14절-17절의 설명을 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즉 답변을 얻어내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설명을 하기 위해

    질문 형태로 말문을 연 것입니다.

 

14절..<"원로님, 원로님께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

    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요한 묵시록 저자가 몰라서 대답을 못한 것

    이 아니라, 아마도 자기가 보고 있는 장면에 대한 감동과 경외심 등 때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제 질문을 했던 원로가 직접 설명을 하게 됩니다.

    <큰 환난>--최후의 심판 직전에 있을 대 박해를 가리킵니다.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

    이라는 말은 대 박해를 겪고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 즉 순교자들이라는 뜻

    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이 구절은 ''순교''를 뜻

    합니다. ''빨간 피로 흰 옷을 빤다.'' 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는 말이 안 되는 표현인데, 여

    기서는 상징적인 표현으로서 ''어린양의 피'',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기 삶을 깨끗

    하게 하고,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새롭게 변모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옷을 빨아서 희게 하였다는 말은 구원이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

    간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자기 것으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5절..<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순교자들이 하

    늘의 성전에서 사제 공동체를 이루어서 ''밤낮으로'', 즉 끊임없이 영원히 하느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무 수행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한 찬미 찬양입니다.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성전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그들이 사제 공동체를 이루

    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그들은 하느님과 함

    께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천막''은 하느님의 보호, 안식, 행복 등을 뜻합니다.

 

16절..<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16절은 이사야서 49장 10절에서 인용한 구절인데, 구원받은 사

    람들의 축복받은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굶주림, 목마름, 해(태양), 열기''는 사막의 고

    통을 나타내는 표현들인데, 14절의 ''큰 환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17절..<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

    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17절

    은 시편 23편 2절, 이사야서 25장 8절에서 인용한 구절인데, 착한 목자이신 어린양께서

    순교자들을 하늘의 오아시스로,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영원한 생명의 샘으로 인도해 주

    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권한

    을 가지신 어린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라는 말은 공동번역 성서처럼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목자처럼''이라는 번역보다 ''목자가 되셔서''가 더 적절한 번역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표현한 것인데, 하늘의 낙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명

    의 샘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말은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신다는 것은 하느님의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된다

    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더 바랄 것 없는'' 지극한 행복, 영원한 행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7장은 요한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어야 할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을 미리 보

    여주는 것은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즉 승리자의 모

    습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이 용기와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

    니다. 묵시록을 읽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8장부터 다시 시작되는 무서운 장면들을 좀

    더 안정된 상태로 대할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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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생명의 샘"

 

 

사막 지역에 살면서

굶주림과 갈증과 태양의 열기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오아시스가 천국일 것입니다.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만 있는 안전한 요새가 천국일 것입니다.

종교 박해로 시달리던 순교자들에게는

마음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천국일 것입니다.

이것들이 묵시록에 그려진 천국의 모습입니다.

천국은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반영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곳,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질병도, 부상도 없고,

그래서 병원도 약국도 필요 없는 곳,

돈 때문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은행도 사채업자도 필요 없는 곳,

시험공부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공부도 시험도 없고,

그래서 학교도 학원도 필요 없는 곳,

실연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는 이별도 눈물도 없는 곳,

배신도 미움도 없고 오직 믿음과 사랑만 있는 곳...

 

 

60억 인류 모두 제각기 바라는 소망대로 천국을 그린다면

천국은 60억 가지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모든 것을 천국의 반대로만 생각하면 그곳이 곧 지옥일 것입니다.

굶주림과 갈증과 태양의 열기와 끊임없는 전쟁과 종교 박해와

질병과 사채업자와 시험공부와

이별의 눈물과 배신과 미움과 탐욕만 있는 곳...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아쉬운 것도 없고,

별로 바라는 것도 없고, 특별한 소망도 없고,

그래서 삶의 의미도 없고, 목표도 없고,

그냥 그럭저럭 하루하루 먹고 자고...

눈물을 흘릴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고,

하느님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천국에 가도 그만, 지옥에 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천국은 어떤 곳이고, 지옥은 어떤 곳이겠습니까?

 

 

희망도 아쉬움도 목표도 목적도 없는 그 상태가 곧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삶,

아무 의미도 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삶,

목표가 없어서 앞으로 나아갈 일이 없는 삶,

오늘은 어제와 다를 것 없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것 없는 삶,

할 일도 없지만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삶,

사랑을 바라지도 않지만 사랑을 실천할 생각도 없는 삶...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곧 지옥일 것입니다.

 

 

천국으로 가고자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자기가 소망하는 그런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노력하는 그의 삶 자체가 천국일 수 있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의욕도 없는 사람은

그곳이 지옥인 줄도 모르는 채로

그냥 그렇게 지옥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2008. 1. 13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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