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따름의 무거움과 가벼움(Die Härte und die Leichtigkeit der Nachfolge) 연중 제23주일(다해)에 봉독되는 루카 복음서 14장에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더욱이 어떻게 그런 요구를 하실 수 있을까요? 당신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니, 비인간적이지 않은가요? 물론 신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미워하다’라는 말은 구약성경의 어법으로, 공격적인 감정이 아니라 아주 객관적으로 ‘이순위로’ ‘후순위로’ 미룬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가벼이 여기다’라는 뜻이지요. 그렇다고 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닌 냉혹함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우리를 안심시키지는 못합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전히 자신을 바쳐야 하고, 그리하여 그저 자기 삶의 반이나 일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온 존재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도 복음이 끊임없이 하는 말이고, 이미 구약성경에도 그런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핵심 계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그러니 루카 복음서 14장의 이 말씀을 외딴섬처럼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복음에서 이 말씀은 약화되고 부드러워지며 평범한 도덕률처럼 됩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은 모두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 선포의 핵심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이런 물음들을 던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요구를 하셔도 되는가? 그런 말씀이 절망스럽게도 너무 과중한 요구는 아닌가? 도대체 그처럼 철두철미한 ‘전부’가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요구로 마지막까지 양심의 가책을 받기보다는 얼른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걸려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 한번 숙고해봅시다.
첫 번째 숙고 앞서 언급했듯, 루카 복음서 14장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모든 힘과 그의 삶 전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전부’라는 게 오직 그리스도교에만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세례 받은 이들에게만 요구되는 일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선한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진찰 시간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이고, 모든 일과 모든 환자에게 온 정성을 다하고, 저녁과 토요일에는 직접 환자를 방문하고, 휴일 저녁에도 일거리를 가져오고, 이밖에도 끊임없이 계속 공부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의사입니다. 그런 의사에게 그저 자신의 일을 반만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어디 의사만 그럴까요? 다른 직업에서도 그런 사람을 한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정치인, 사업가, 운동 선수들을 들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한 배구 감독이 최근기자 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온전한 헌신만이 성공을 가져옵니다. 우리 선수들에게 배구는 하나의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배구를 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들은 십 년을 매일 네다섯 시간씩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술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반만 하고 그친다는 것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습니다. 모든 예술가가 자신의 전부를 투여하고 힘과 시간을 온전히 다 쏟아야 합니다. 또 다른 예로, 암벽을 오르는 등반가가 자신의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암벽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큰 여객기를 모는 조종사가 노선을 벗어나면, 그는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보통의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직업을 가리켜 반쪽 마음으로 그저 적당히 때우고 만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명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거나 신앙의 삶을 위해서는 힘을 그저 반만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습니까. 신앙을 위해서는 주일에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 매일 드리는 아침저녁기도나 가끔씩 선한 목적을 위해 바치는 기부금이면 족하다고 여긴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복음서에서 매번 예수님이 당신 추종자들을 향해 자신의 온 존재와 온 삶을 다해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을 따르라고 거듭 말씀하신다면, 정확히 말해 그것이 세상에서 흔히 보는 지극히 일반적인 모습이 아닐는지요. 진지하고 책임 있는 사회라면 그 어디서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 숙고 누구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자유의 문제이고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입니다. 짧지만 매우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필레몬 서간에서 바오로는 도망쳐 나온 종인 오네시모스를 위해 필레몬에게 부탁을 합니다. 오네시모스는 주인인 필레몬에게서 달아나 바오로에게 피신해 왔습니다. 그때 바오로는 에페소의 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지요. 바오로는 감옥에 있으면서 오네시모스를 가르쳐 그에게 세례를 줍니다. 이제 바오로는 그를 돌려보내며 그 주인에게 부탁을 합니다. 곧 오네시모스를 용서하고 다시 집에 받아들여 달라고, 나아가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주라고 청합니다(필레 14-16절 참조).
여기서 제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것은, 커다란 사랑과 진심을 담아 쓴 이 서간에서 바오로가 명령하지 않고 ‘부탁’한다는 사실입니다. 필레몬의 행동이 강요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권고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그의 자유에 달렸습니다(14절 참조).
예수님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따를지 말지는 각자의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 14장 26-27절에 곧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먼저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요청하십니다. 곧 탑을 세우는 일에 견주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루카 14,28-30 참조). 탑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게 많습니다. 탑을 세우면서 하중을 무시한다든지 공사 도중에 자금이 떨어진다든지 하면 낭패입니다. 도시 전체에 우스갯거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허투루 따르려는 이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아주 현실적으로 생각하십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그 사람 전부를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 자신이나 나의 수백 가지 개인적 이해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여러 사소한 일 가운데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세 번째 숙고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온 힘을 다하고 전부를 걸라고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이 제자들의 어깨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우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모든 것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요구와 그에 따른 헌신은 억압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일으키고 인간 창조의 목적에 맞갖은 품위와 자유를 비로소 선사해줍니다. 여기서도 우리 일상의 보통 세계를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가 자기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집을 짓기 위해 몇 년 동안 절약도 하고, 또 공사의 일부는 직접 자신이 손수 한다고 합시다. 밤늦게까지 손을 놓지도 않고, 일은 고되고, 여러 난관에도 부딪힙니다. 그는 진이 빠지도록 힘써야 하고, 아내도 마찬가지로 고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에게 자기 집을 짓는 일이 감당할 수 없는 짐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들 안에 기쁨이 큽니다. 그들은 집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머지않아 거기 살 생각에 기뻐합니다. 정원은 어떻게 꾸밀지 벌써 계획을 짭니다. 정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그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위해 일하고 감히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됩니다. 기쁨으로 하는 일은 무거운 짐이 되지 않습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마태 13,44 참조)에서도 예수님은 정확히 같은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가난한 일용 노동자가 밭을 일구는데, 쟁기에 보물이 부딪힙니다. 그는 두 손으로 보석과 은화들을 확인한 다음, 재빨리 다시 그 보물을 묻어 둡니다. 그러고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법적으로 그 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확실히 해 두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핵심은, 보물이 발산하는 매력과 그 보물을 발견한 이를 채우는 커다란 기쁨에 있습니다. 보물을 발견한 이는 자신의 ‘전부’를 다 쏟아 부어도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는 일생일대의 거래를 감행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나의 본당을 위해 그리고 이로써 교회를 위해 헌신한 그 어떤 시간도 잃어버린 시간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요? 그 시간들은 우리 삶에서 가장 귀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바친 것이 셈해질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은 저마다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소명을 갖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신앙의 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누구에게는 더 많이 원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많은 이에게, 자신이 가톨릭 교회에 속한다는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가톨릭 교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늘 마음으로 기뻐하며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더 바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것도 이미 한없이 많은 것일 수 있습니다.
확신하건대, 삶은 하느님 것에 대한 순전한 감사와 순전한 기쁨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이미 성덕의 높은 경지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이 칼럼은 저명한 성서신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보내오는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9년 9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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