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사목교서 ‘성서의 해Ⅰ’] 판관기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에 데리고 들어간 여호수아도 이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여호 24,19; 판관 2,8 참조). 모세와 함께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두 번의 큰 세대의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가르침을 직접 전해 주었던 모세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을 판관기는 시작과 함께 알려줍니다. “그(여호수아)의 세대 사람들도 모두 조상들 곁으로 갔다. 그 뒤로 주님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업적도 알지 못하는 다른 세대가 나왔다”(판관 2,10). 여호수아기는 약속의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면 전투에서 승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신명기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도식은 판관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 곳에서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이방신들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이방신으로 바알과 아스타롯이 등장합니다. 신명기의 가르침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참조: 신명 6,4-5). 모세에서 여호수아,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조상들을 이끌어준 야훼 하느님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해집니다. 아울러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난 이방신들은 야훼 하느님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신들을 쉽게 접하고 섬기면서 하느님을 배신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명기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삶의 여정을 걷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불충에 대한 심판으로 미디안이나 필리스티아와 같은 이방 민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그때서야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그제야 하느님께서 판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구해주십니다. 판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재판관(שׁפטי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재판관이라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등장하는 판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바로 판관기입니다. 판관기에는 모두 열두 명의 판관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다시 소판관과 대판관으로 구별해서 바라보는데, 소판관의 이야기는 판관으로 다스린 기간과 고향, 묻힌 장소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만이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대판관의 경우는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는 차이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판관은 기드온, 삼손 등이 있지요. 판관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어줍니다. 판관들은 우선적으로 이방 민족의 침입에 대하여 대항합니다. 여호수아기에서처럼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 아닌, 주님께 충실했는지 여부에 달려있었습니다. 따라서 판관들의 승리는 판관들 개인의 뛰어난 지도력이 아닌,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알려줍니다. ‘하느님께 순명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복을 받게 된다’는 신명기의 가르침 안에서 판관기는 전개됩니다. 판관기는 그렇게 이방 민족의 위협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럼, 그렇게 위기를 넘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길을 걸었을까요? 아쉽게도, 그들은 어려움을 넘기면, 다시 다른 이방신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판관 3,12; 4,1; 6,1; 10,6; 13,1)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봅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때는 하느님을 열심히 찾습니다.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이 지나도 우리는 하느님을 열심히 찾았나요? 하느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쫓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지요. 우리에게 발견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통해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살겠노라고 다시 결심해보면 어떨까요? [2019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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