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성경] 주방 (1) ‘문門’에 이어 다룰 집 안의 두 번째 장소는 ‘주방’이다. 집 안의 ‘주방’ 혹은 ‘식당’이라는 단어를 누군가에게서 듣는다면 어떤 장면이 떠오를까? 잘 연상되지 않는다면 주방의 ‘있음’이 아닌 주방의 ‘없음’을 생각해보자. 주방이 없다면, 이른 아침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 불을 켜고 움직이는 소리, 커피를 만드는 소리, 찌개를 끓이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 올리는 소리, 밥솥 안에 밥이 익으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뿜는 소리, 도마에 칼이 부딪쳐 내는 소리, 식탁에 반찬과 수저를 올려놓는 소리, 엄마가 밥 먹으라며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 등이 집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집과 호텔의 다른 점이 무얼까? 정성껏 준비한 재료를 물과 불 그리고 다양한 요리 기구를 이용하여 먹기 좋게 다듬고 익힌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탄생한 가정 음식의 고향인 ‘주방’은 그 가정의 온도를 확인할 수 있는 집 안의 장소가 된다. 그러나 인스턴트식품이나 냉동식품과 같은 간편식 문화, 그리고 외식과 배달 문화로의 대체가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가정의 온도를 확인할 길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보통 한 집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들을 지칭해 ‘가정’, ‘가족’ 그리고 ‘식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중 ‘식구’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을 서로 나눈다는 의미를 연상케 하는 단어이며 나아가 집에서 주방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주방은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뿐만 아니라 ‘존재를 유지하는 생각’을 서로 나누는 공간이다. 여기서 나눈다는 의미는 ‘내 생각을 쪼개어 너에게 준다는 방향’과 그 반대인 ‘네가 쪼개 준 생각을 내가 안다는 방향’도 포함한다. 따라서 식탁에서 이뤄지는 구성원과의 대화는 ‘내 생각을 그 사람에게 말해 그 사람이 알게 하는’ 일방적인 형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에게 한 말을 내가 알게 되는 형식’도 갖추어야 한다. 이로써 식구들과의 음식 나눔과 생각 나눔은 서로의 입맛과 관심사를 알게 하며, 결국에는 하나의 밥솥에서 나뉘어 각자의 밥그릇에 밥이 담기는 것처럼 서로의 ‘생명’과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한다. 주방은 또한 삶의 기초적인 요소들이 한데 모이는 장소이다. 주방의 물은 갈증을 풀거나, 음식을 하거나, 채소나 과일을 씻거나, 싱크대를 청소하는 데 쓰인다. 불은 하나의 가치로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꼭 필요한 것이다. 음식 중에는 약한 불로 긴 시간과 많은 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천천히 조리한다는 것은 음식에 적당한 불을 가하면서 서두름 없이 시간을 갖는 것을 말한다. 현대의 급변하는 흐름 안에서는 종종 조리를 위해 필요한 ‘시간’을 갖지 않으려는 위험에 직면한다. 이는 관계를 깊숙이 맺음으로써 생기는 열을 통해 그 관계를 개선하는 조리 시간을 갖지 않는 위험과 같다. 어떻게 주방 안에 머무는지, 어떻게 조리를 하는지에 대한 것은 그 가정의 가치, 관계, 행동과 관련된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다음 지면에서는 이러한 주방의 의미와 연결된 성경 부분들을 살펴보겠다. [2019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생활 속의 성경] 주방 (2) 지난 지면에서 집에 자리한 주방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주방은 ‘생명’과 ‘존재’를 유지하는 ‘음식’과 ‘생각’을 ‘나누는 곳’이자, 불이나 식기류 등과 같이 잘 정돈된 다양한 요소들을 이용해 서서히 시간을 들여 ‘조리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주방의 성격인 ‘나눔’과 ‘조리’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먼저 음식을 ‘조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불’을 떠올릴 수 있다. 성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리하시는 ‘불’처럼, 우리의 딱딱하고 차가운 부분을 이웃들을 위한 음식으로 부드럽게 요리하시는 ‘불’처럼 종종 등장하신다. 구체적으로 자기 동족의 비난을 받아 이집트에서 미디안으로 도망하여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있던 모세의 이야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불타고 있지만 타버리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다. 신기하고 희한한 자연현상 정도로 치부해 버릴 수 있었음에도 모세는 그 오묘한 장소로 ‘끌리듯’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자신의 눈으로 보게 된 현상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멈춰 세운다. ‘말씀’하고 계신 분이 자기 선조들을 이끌어 오셨던 분임을 깨닫고는 선조들이 그랬듯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모세는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는 것을 자각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의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린다. 여기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말씀’과 ‘행적’을 통해 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조리하신다는 사실이다. 외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수단과 방법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건을 통해 모세가 하느님과 실제로 만났다는 데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떨기나무의 불’로 모세의 마음을 조리하셔서 모세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셨고, 만나고 들을 수 있게 하셨으며, 거룩한 영역으로 옮겨주기까지 하셨다. 다음으로 식탁에서 이뤄지는 ‘나눔’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함께 모여 서로 ‘빵’을 나눈다. 나누어진 빵은 실제 예수님의 나누어진 몸이 되어 우리에게 영해지고 우리 생명을 부지하는 양식이 된다. 성당에서 외적으로 거행되는 이 체험은 이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 늘 반복하셨던 ‘식탁에 둘러앉는 행위’로 우리를 초대한다(세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 빵을 많게 하신 기적 등). 이 행위는 당신의 분명한 삶의 계획을 요약하고 ‘당신을 기억하도록’ 제자 공동체를 초대하시면서 마지막 순간에 명하시며 취하신 모습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식탁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최후의 만찬을 예로 들자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먹게 될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다. 만일 그 빵을 ‘당연한 내 것’이라 여기셨다면 감사드릴 필요가 없었다. 그 일용할 빵을 허락하신 분이 있기에 감사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그 주어진 빵은 이내 나뉘어져 많은 이들의 생명을 지속시키는 양분이 된다. 누군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을 받은 나 역시 내 주변에 있는 이에게도 그렇게 해야 함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의미가 감춰진 상징의 상태’를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에만 머무르시지 않는다. 당신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온 ‘받은 빵’이시자 ‘나눠지는 빵’ 자체라고 그 자리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제자들에게는 이를 행하라고 덧붙이신다. 이렇게 예수님의 감사와 제자들의 감사는 바로 ‘주어져 받게 된 빵’과 ‘나누어 주는 빵’ 사이에 위치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불로 조리하셔서 우리가 당신을 만나, 당신으로부터 받은 무상의 선물에 대해 감사드릴 수 있게 하신다. 받은 선물에 대한 감사는 이것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님을 동반하기에 ‘나눔’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나눔의 자리에서 형제와 식구의 진정한 의미가 피어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온기로 서로의 마음을 데우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주방이다. [2019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일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전주주보 숲정이 3면, 이상훈 안토니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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