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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사도행전 이야기38-39: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사도 13,13-52)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3 조회수6,514 추천수0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8)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사도 13,13-52) (상)


바오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자 예수를 알리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

 

 

사도행전 저자는 이제부터 ‘사울’의 선교 활동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전합니다. 파포스에서 총독을 믿음으로 인도한 바오로는 소아시아 지역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들어가 그곳 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이야기를 두 번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바오로의 설교(13,13-41)

 

바오로 일행 곧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갑니다. 그들이 조수로 데려갔던 요한은 그곳에서 일행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바오로 일행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습니다.(13,13-14)

 

페르게는 터키의 남서쪽 지중해변 항구도시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도시로 유명했다고 하지요. 바오로 일행은 이곳에서 요한 마르코와 헤어져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릅니다. 페르게에서 150㎞ 이상 떨어진 이 내륙 도시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05~기원전 63) 때부터 많은 유다인이 살면서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다인 회당도 있었겠지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목적지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인 회당에서 먼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지요.

 

회당에서 안식일 전례가 시작됐습니다.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에게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달라고 청하고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에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고 말하기 시작합니다.(13,15-16)  

 

‘회당장’이 아니라 ‘회당장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 회당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회당장들이 바오로 일행을 지목해 격려 말씀을 청한 것은 바오로 일행이 외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지만 믿음 깊은 이들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당에는 유다인들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 뿐 아니라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카이사리아의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처럼(10,2 참조) 유다교를 존중하고 유다교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1세기에 유다인 회당에서 이뤄지던 안식일 전례를 잠시 살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먼저 “셔마 이스라엘” 곧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성경 구절(신명 6,4-9; 신명 11,13-21; 민수 15,37-41)을 봉독한 다음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고는 율법 곧 모세 오경의 한 단락과 예언서의 한 단락을 봉독합니다. 이어 회당장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말씀, 곧 설교를 부탁합니다. 그런 다음에 축복(민수 6,24-26)으로 마무리한다지요.

 

이제 바오로의 설교 내용을 살펴봅시다. 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에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면서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다고 설파합니다.(13,17-26) 둘째 부분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단죄하고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다윗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예언을 실현하셨다고 선포합니다.(13,27-37) 셋째 부분은 회당에 모인 청중을 향한 호소 또는 경고입니다.(13,38-41) 이 셋째 부분은 다시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의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 모세의 율법으로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바쿡 예언서를 인용한(하바 1,5) 경고입니다.

 

바오로의 설교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예루살렘 최고의회에서 설교한 내용(7,1-53)과 비슷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는 부분은 스테파노의 설교에 비해 훨씬 짧습니다. 대신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분이 어떻게 해서 죽임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지에 대한 부분은 훨씬 깁니다.

 

두 사람의 설교가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스테파노가 설교를 하는 대상인 예루살렘 최고의회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직접 연루된 당사자들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는 그들이 저지른 죗값을 묻기 위해 이스라엘 역사를 길게 설명하면서 오시리라고 예고된 그분,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신하고 죽였다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반면에 바오로는 조상들의 역사보다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리는 데에 더욱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은 나자렛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들었을지 모르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를 고려해서 바오로는 유다인들이 잘 아는 구약의 긴 역사는 대폭 줄이고 상당 부분을 예수님에 관해 할애했다고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큰 차이는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지만 믿음으로는 의롭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로마 3,21-31; 10,4.10-11 등)  바오로 특유의 신학적 사상이 담긴 표현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바오로는 “예언서들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분에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하는 “보아라, 너희 비웃는 자들아! 놀라다 망해 버려라. 내가 너희 시대에 한 가지 일을 하리라.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어도 너희가 도무지 믿지 못할 그런 일이다”라는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하바 1,5)을 인용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칩니다.(13,40-41) 바오로의 설교에 청중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다음 호에서 계속 살펴봅니다.

 

 

생각해봅시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에는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13,38ㄷ-39)라는 부분입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지만, 바오로 사도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여기에는 바오로 사도 자신의 체험이 깊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는 누구보다 충실히 율법을 지켰던 열렬한 바리사이파 젊은이였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과 깊은 회심을 한 후 그는 바뀌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곧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을까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유다인이 많이 살았지만,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회당에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다인들처럼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이 고백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한 구원보다는 하느님께서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바오로가 한 설교는 이방인을 향한 복음 선포의 새로운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10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39)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13,13-52) (하)


유다인들의 박해에도 성령의 기쁨 가득 찬 주님의 일꾼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이코니온으로 간다. 사진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유적.

 

 

바오로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설교한 후 회중의 반응과 그 후속 상황에 대해 사도행전 저자가 전하는 내용을 살펴봅니다.(13,42-52)

 

“그들(바오로 일행)이 회당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러한 말씀을 해 달라고 청하였다.”(13,42) 이로 미루어 회중은 바오로의 설교에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회중이 흩어진 후에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바오로 일행을 따라왔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지요.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듭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지요.(13,44-45)

 

이 구절을 볼 때 유다인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오로의 설교에 호감을 갖고 주님 말씀을 들으려는 이들과 바오로 일행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입니다. 반대자들은 왜 반감을 갖게 됐을까요? 우선 이들은 도시와 회당에서 기득권 세력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자기들 대신 바오로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 곧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함으로써 자기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슬렀습니다. 결국, 한편으로는 시기심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자기들의 신념을 거스른 데 대한 분노에서 유다인들은 반감을 갖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13,46)

 

하느님의 말씀을 유다인들에게 먼저 전해야만 했다는 말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면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6)고 하신, 그리고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마르 7,27)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 이 ‘사도행전 이야기’를 통해 지금까지 살펴본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들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지요. 그러다가 점차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실” 뿐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화가 베드로 사도가 본 환시(사도 10,9-16)와 코르넬리우스 집안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린 일(10,44-45)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선교 활동은 이 과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힘”(로마 1,16)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13,57)

 

이사야 예언서 49장 6절을 인용한 이 성경 말씀은 원래는 예수님께 적용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를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곧 자신들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두 사람은 유다인을 넘어서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안티오키아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파견을 받은 이들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이런 말에 다른 민족 사람들은 기뻐하며 주님 말씀을 찬양합니다. 또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집니다.(13,48-49)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졌다는 표현을 두고 이른바 ‘예정설(豫定說)’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있지만, 학자들은 유다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일 따름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하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쫓아냅니다. 바오로 일행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갑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사도행전 저자는 기록합니다.(13,50-51)

 

 

생각해봅시다

 

1.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사는 유다인들이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바오로 일행을 쫓아낸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경고가 됩니다. 시기심은 눈을 가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심은 또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비롯합니다. 시기심과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자기를 비우고 진실에 귀를 기울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나약함을 지닌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갇혀 있지 말고 더 나은 선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

 

2.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대목 또한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획했던 또는 추진했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거나 풀릴 때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고 기뻐합니다. 반면에 뜻대로 되지 않을 때나 반대에 부딪혀 일을 그르치게 될 때는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하거나 좌절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노력했는데 엇나가게 될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일꾼’들이라면 그럴 때도 기뻐할 수 있음을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1-12)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라는 말씀을 따라, 해야 할 일을 다 하면서도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겨드린다는 자세를 지닌다면, 우리는 역경에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순교 선조들은 이미 그렇게 사신 분들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1월 17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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