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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특집: 성경 속 가난의 의미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1-19 조회수7,561 추천수0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특집] 성경 속 가난의 의미는?


가난의 참 의미 깨닫고 실천할 때 참행복 누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11월 ‘자비의 희년’을 폐막하며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천명했다. 올해 한국교회는 11월 17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낸다. 이날의 제정 배경은 교황이 계속 강조해온 ‘자비’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교황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통해 교회 전체와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이들을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도록 초대한다. ‘가난’은 그리스도인이 선택하고 중시해야 하는 삶의 자세와 생활양식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세계 가난한 이의 날을 맞아 구약과 신약에서 보는 가난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본다.

 

조앙 제페리노 다 코스타의 ‘과부의 헌금’(1876).

 

 

구약의 가난

 

구약에서는 가난이 궁핍한 자, 가련한 자, 억눌린 자, 핍박받는 자 등으로 드러난다.

 

구약 전체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가난’은 히브리어 ‘에브욘’이라는 단어를 통한 ‘빌어먹는 신세, 거지 신세’를 가리킨다. 물질적으로 어렵고 집이 없는 이들(이사 14,30)이나 굶주림에 시달리고(이사 32,6-7)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아모 2,6; 8,6) 등을 말한다. 특별히 시편에서는 이런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관심 대상이고 구원 대상이라고 언급한다.(시편 35,10 등)

 

‘가난한 농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들은 합당한 법적 대우를 받지 못하고(이사 10,2) 빚을 못 갚는 경우는 노예가 된다(아모 8,6). 하느님은 이런 힘없는 농민의 보호자로 그려진다.(이사 25,4 등)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도 표현된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막쏘르’를 써서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거나 인색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된 경우를 묘사했다. 잠언 24장 33-34절,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가 대표적이다.

 

바람직한 가난의 개념도 있다. 코헬렛에서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젊은이가 더 이상 조언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늙고 어리석은 임금보다 낫다’(4,13)고 했고, 잠언에서는 ‘그릇된 입술을 가진 우둔한 자보다 가난해도 흠 없이 걷는 이가 낫다’(19,1)고 한다.

 

정치적 및 경제적 약자의 의미도 나온다. ‘젊은이가 설사 임금의 통치 때에 빈곤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감옥에서 나와 임금이 된다’(코헬 4,14)는 구절은 권력 없는 가문에서 한 사람이 나와서 최고 권력의 자리에까지 오른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또 ‘국가 안에서 가난한 이에 대한 억압과 공정과 정의가 유린됨을 본다 하더라도 너는 그러한 일에 놀라지 마라’(코헬 5,7)등에서는 경제적으로 수탈당하는 이들의 가난을 밝힌다.

 

아울러 사회적 불의와 억압에서 빚어진 가난의 개념은 구약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이자들은 힘없는 이들의 소송을 기각시키고 내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약탈하고 고아들을 강탈한다’(이사 10,2) 등에서는 법적으로 부당하게 취급받는 빈민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들,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분이다.(시편 12,5 등) 한편 이 가난은 불의보다 나은 것으로 묘사된다.(잠언 16,19)

 

경건한 가난도 있다. 자주 회자되는 히브리어 ‘아나빔’은 예언서와 시편, 지혜 문학에서 ‘가난한 자’, ‘경건한 자’, ‘겸손한 자’ 의미로 사용된다.(시편 25,9; 34,2)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아나빔)을 잊지 않으시며(시편 10,12), 이들 역시 하느님께 간구한다.(시편 9,18)

 

 

신약의 가난

 

신약에서는 가난한 자가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특권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린다. 복음서에서는 가난이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마태 5,3; 루카 6,20)과 예수 자신의 생활이나 제자들에게 요구한 생활 조건(마태 8,20; 10,9-10; 루카 9,58 등)이다. 사도들도 예수가 가르쳤던 대로 가난하게 생활했으며 부자들에게 경고하며 가진 바를 나누고(마태 25,35-46) 자선을 베풀 것을 역설했다.

 

신약에서 드러나는 가난한 이의 공통적인 특징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없는 이, 또 집이 없고 일할 자리가 없어서 비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갚아 주시고(루카 14,13-14),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마태 25,34-36). 또 상을 받고(마태 10,42) 하늘에서 보화를 얻는다.(마태 19,21; 루카 12,33)

 

가난한 자를 억누른 대가는 심판을 받으며(마태 25,41-43) 비참한 일들을 당한다.(야고 5,1)

 

이런 가난의 모습은 윤리신학적 측면으로 볼 때 개념이 좀 달라진다. 사회적 물질적 결핍으로서의 가난과 수덕상의 가난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자는 사회적이고 물질적 결핍의 가난으로서, 인간들이 함께 노력해서 극복해야할 인간 조건이다. 후자는 복음삼덕의 하나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한 생활을 말한다. 스스로 취한 단순 소박한 생활 모습이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자의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표시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든 가난의 의미를 깨닫고 생활할 의무를 지닌다. 예수가 가르친 참행복의 첫째 조건이 ‘가난’이었다.(마태 5,3; 루카 6,20)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9년 11월 17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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