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41) 안티오키아로 돌아감(사도 14,19-28)
믿음의 문을 연 바오로의 첫 선교 여정 - 바오로 사도는 데르베까지 가서 선교한 후에 다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페르게를 거쳐 아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 교회로 돌아옴으로써 1차 선교 여행을 완수한다. 사진은 이코니온(오늘날 터키 콘야)에 있는 바오로 사도 기념 성당. 바오로는 다시 박해를 받아 데르베로 피신합니다. 그렇지만 바오로 일행은 선교를 멈추지 않았고 왔던 도시들을 다시 거쳐 가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첫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칩니다. 돌 맞고 데르베로 가다(14,19-20) 자기들을 신으로 떠받들려는 리스트라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나니,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옵니다. 그들은 군중을 설득해 바오로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고는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해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립니다.(14,19) 바오로는 회심한 후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유다인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제자들이 밤중에 그를 바구니에 실어 성 밖으로 내보냈었지요.(9,23-25) 또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도 박해를 받아 쫓겨납니다. 이코니온에서는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고 해 리스트라로 피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30㎞ 떨어진 이코니온의 유다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보다 다섯 배나 더 멀리 떨어진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있는 유다인들까지 리스트라로 몰려와 군중을 설득해 바오로에게 돌을 던집니다. 바오로가 죽었다고 생각해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릴 정도였으니까 바오로는 심하게 돌팔매질을 당했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당한 돌팔매질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2코린 11,25)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바오로는 다시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가서 이튿날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납니다.(14,20) 데르베는 리스트라에서 동쪽으로 100㎞쯤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선교를 마치고 안티오키아로(14,21-28) 바오로는 돌팔매질을 당하고 데르베로 피신해 갔지만, 데르베에서도 선교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르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을 거쳐 안티오키아, 곧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갑니다.(14,21) 말하자면 데르베 선교를 마지막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리스트라와 이코니온, 안티오키아는 모두 유다인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을 쫓아낸 도시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도시들을 다시 거쳐 간 것은, 이 도시들에서 믿음을 받아들여 제자가 된 이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교회를 책임질 원로들을 임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자기들을 쫓아낸 이 도시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기초를 세우는 일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라며 제자들을 격려하고, 단식과 기도로 그들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14,22-23) 그런 다음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페르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이 키프로스 섬에서 복음을 전한 후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갈 때 거쳤던 항구도시였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이들이 처음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갈 때는 페르게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만, 돌아오는 길에는 페르게에서도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 다음 페르게 서남쪽으로 20㎞쯤 떨어진 항구도시 아탈리아로 내려갑니다.(14,24-25) 아탈리아에서 배를 타고 마침내 선교 활동을 위해 처음 출발했던 도시 안티오키아로 갑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해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14,26) 바오로 사도의 1차 선교 여행이 이렇게 완료됐습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은 도착 즉시 신자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해 주신 모든 일에 대해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에 대해 보고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고 루카는 기록합니다.(14,27-28) - 바오로 사도의 1차 선교 여행 경로. 생각해봅시다 1.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은 키프로스 섬에서 내륙인 소아시아 지방으로 들어갈 때에 페르게를 거쳐서 들어갔고 돌아올 때도 페르게를 거쳐서 돌아옵니다. 그런데 페르게에서는 내륙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 돌아올 때에 말씀을 전합니다. 왜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했을까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선교를 떠날 때 먼저 유다인들에게 갔습니다. 이방인 도시에서도 유다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았습니다. 페르게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모시는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페르게에 유다인 회당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루카는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바오로 일행이 바로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로 갔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내륙으로 들어갈 때에 페르게에서 선교를 하지 않은 이유를 적어도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인 회당이 없거나 아니면 유다인들의 수가 선교를 위해 머물러야 할 만큼 많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둘째, 페르게보다는 내륙에 있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많은 유다인이 살고 있었고 회당도 있었기에 그리로 바로 가는 것이 선교 목적에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돌아오는 길에는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했을까요? 우선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어서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오로 일행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를 거쳐 이코니온과 리스트라, 데르베까지 가면서 선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도 직접 선교하게 됐습니다. 그렇다 보니 돌아오는 길에는 페르게가 이방인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런 추정은 바오로 사도의 첫 번째 선교 여행이 지니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2. 바오로 일행은 가는 곳마다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아 그곳에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리스트라에서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한 설교(14,15-17)는 유다인이 아니라 직접 이방인을 상대로 한 설교입니다. 정황으로 볼 때 바오로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나 광장에서 설교했음이 분명합니다. 이 이방인들은 유다교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바오로의 치유와 또 그의 설교를 듣고는 자기들이 믿는 신들이 내려온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들이 신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변명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저자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라고 기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12월 1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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