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 열 처녀의 비유
대림절, 기다림의 의미 대림절이 시작되면 제대 앞에는 대림을 알리는 네 개의 초가 놓입니다. 성탄을 향해 한 주간씩 시간이 더해질 때마다 제대 앞 촛불도 하나 둘 빛을 더해갑니다. 대림待臨이란 ‘도착’을 뜻하는 라틴말 ‘아벤투스(Aventus)’에서 온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대림시기에 제대 앞에 초를 밝혀 나가는 것은 가까이 다가오시는 주님에 대한 그리움의 빛이 더해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구세주의 오심은 온 인류가 경험하는 최고의 기적이며 인류를 향한 하느님 은총과 축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2월은 세상의 달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이지만, 교회의 달력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벅찬 희망으로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는 달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는 이런 ‘기다림’의 의미를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 처녀의 비유’는 예수님 시대에 흔히 일어나는 혼인잔치 풍습을 비유로 든 것입니다. 당시 남녀가 약혼을 하면 결혼을 준비하는 약 1년 정도의 기간을 보낸 후 혼인을 하게 됩니다. 때가 되면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가는데 신랑을 맞이한 신부는 친구들과 함께 등을 들고 행렬을 하여 신랑 집으로 가서 성대한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혼인 풍속은 구약성경(호세아, 애가)뿐 아니라 신약에서도 종종 종말론적 상징으로 표현되었습니다(마태 9,14-17, 묵시 21,9). 구약에서 하느님이 신랑이었고 이스라엘이 신부였다면 신약은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들’이 교회의 신랑이었습니다(2코린 11,2 참조).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이고 그들의 모든 역사는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처녀’처럼 아무런 준비가 없던 백성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태오 공동체는 예수님의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그들이 기다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신랑의 표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랑을 기다리는 한편의 ‘슬기로운 처녀’와 다른 한편의 ‘어리석은 처녀’의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초기 마태오 공동체 안에서 재림하실 예수님이 늦어지는 것에 대하여 그분의 다시 오심을 굳게 믿고 희망을 잃지 않는 한편의 충실한 신자들과, 그렇지 못한 절망하는 신자들을 비교하며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비유에서 보는 것처럼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 이 두 그룹은 모두 등을 준비하였고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랑이 오자 슬기로운 처녀들은 저마다 등을 챙겨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 혼인잔치에 참여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불을 밝힐 기름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등을 ‘챙기다’라는 의미의 희랍어 코스메오(κοσμέω)는 심지를 손질해서 불이 환하게 잘 타오르게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준비가 안 된 어리석은 처녀들은 결국 불을 밝힐 수 없었고 하늘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다섯의 슬기로운 처녀들이 어리석은 처녀들과 기름을 나누지 않은 것은(8-9절 참조) 램프에 담긴 기름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빌릴 수도 빌려줄 수도 없는 어떤 것을 상징합니다. 이를 두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등불에 불을 밝힐 ‘기름’이란 바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1)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는 사랑의 행실들 즉, 정의, 평화, 용서, 선행, 배려 등 각 사람이 가진 삶의 성숙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열 처녀들은 기다림의 모습은 같았지만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빛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 내면의 사랑에서 발현되는 착한 행실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 신랑을 맞을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맞이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둠 속에 있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기다림 속에 준비되어야 할 우리들의 내적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상영된 장예모 감독의 ‘5일의 마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교수였던 남편 루옌스가 사상범으로 몰려 오랜 세월 감옥에 있다가 탈출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와의 정이 없던 어린 딸은 자기가 반동분자로 몰릴까 두려워 아버지를 신고하게 되고 루옌스는 다시 잡혀 들어갑니다. 수년 후 루옌스가 무죄 판결을 받고 돌아왔을 때 아내(펑완위)는 그때 받은 충격으로 심인성 기억장애를 입어 돌아온 남편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루옌스는 아내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다해보지만 오로지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남편의 편지에 적힌 5일에 돌아온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달 5일이면 어김없이 기차역에 나가 남편을 기다립니다. 아내의 기억을 되돌릴 수 없게 된 남편 루옌스는 결국 아내의 옆집 아저씨로 살며 그녀의 기다림에 동행자가 되어줍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 루옌스는 눈이 펑펑 내리는 그날도 인력거(릭샤)에 아내를 태우고 또다시 기차역으로 나갑니다. 부부의 얼굴에 패인 주름이 이미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 루옌스는 아내와 함께 자신의 이름이 적힌 손 팻말을 들고 도착한 승객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아내가 잃은 기억의 남편, 루옌스를 기다립니다. 남편이 함께 있지만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그 끝 모를 기다림이 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미래를 향한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기다림 속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다림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며 그리워하기에 우리는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대림절은 그 기다림의 정체, 우리가 그리워하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밝힙니다. 먼 옛날 구약에서부터 이사야 예언자가 그토록 외치며 알려주고 싶어 했던 분입니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 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21-22) 사실 구약의 주님은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어 우리 안에 이미 와 계시지만 우리는 예수님 비유 속의 어리석은 처녀들처럼 그분을 맞이하지도 만나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리운 신랑을 옆에 두고도 끊임없이 신랑을 기다리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해마다 대림절이면 이런 기다림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성과 지성, 인간의 지혜 그 무엇으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2) 속에 싸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우리가 사랑할 때 사랑이신 그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내면의 사랑에서 발현되는 정의, 평화, 온유, 친절, 용서의 등불을 밝혀야 우리 가운데 계시는 신랑이신 주님을 알아뵈올 수 있습니다. 기억은 지워지지만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지요. 우리에게 베푼 하느님의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당신’이 되어 우리의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그분 사랑이 우리의 간절한 그리움이 되어 삶 속에서 불을 밝힐 때까지 우리의 기다림은 계속될 것입니다. 올해도 기다림의 시간, 대림절의 촛불은 타오릅니다. 1) 이우식, 『마태오 복음』, 바오로딸, p.364-365 참조. 2) 「무지의 구름」은 14세기 후반에 나온 작자미상의 책으로 오랜 기간 축적된 교회의 전승이 고스란히 담긴 관상서이다. 이 책의 저자는 하느님은 무지의 구름 너머에 계시는데 우리의 이성과 지성이 아니라 사랑으로써만 그 구름을 지나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전원 -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서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도봉산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하고 있다. 저서로 『말씀으로 아침을 열다 1ㆍ2』 『그래, 사는 거다!』가 있다. * ‘전원 신부의 행복한 비유 읽기’는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님들께 그리고 아름다운 글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풀이해주신 전원 신부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생활성서, 2019년 12월호,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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