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46) 바오로 사도의 두 번째 선교 여행 Ⅲ(사도 16,35-17,15)
박해에도 유다인 회당 먼저 찾아가 선교하다 - 필리피에서 테살로니카로 온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유다인들의 시기를 받아 다시 베로이아로 가서 선교 활동을 계속한다. 사진은 테살로니카의 중심부에 있는 정교회 성당 전경. 필리피 감옥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다 열렸고 간수는 자결을 시도하려다 바오로의 만류로 목숨을 건집니다. 바오로는 간수와 그 집안 식구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풉니다. 지난호에서 살펴본 내용입니다.(16,25-34) 사도행전 본문에는 언급이 없습니다만, 바오로와 실라스는 간수와 함께 감옥으로 돌아갑니다. 풀려난 바오로와 실라스(16,35-40) 날이 밝았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를 감옥에 가두게 했던 행정관들은 시종들을 보내 그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바오로가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매질하고 감옥에 가뒀다가 슬그머니 풀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 행정관들이 직접 와서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항변합니다.(16,5-37) 당시 로마 시민에게는 매질을 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어서 바오로는 이같이 항변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행정관들은 겁이 나서 두 사람에게 와서 사과하면서 도시를 떠나 달라고 청합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을 나와 리디아의 집으로 가 형제들을 격려한 후 필리피를 떠나지요.(16,38-40) 테살로니카 선교(17,1-8) 바오로 일행은 필리피를 떠나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테살로니카에 이릅니다.(17,1) 이들이 테살로니카까지 온 길은 서쪽으로 계속 가면 아드리아 해에 이르고 바다를 건너면 이탈리아 남쪽 도시 브린디시와 연결됩니다. 반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동쪽으로 계속 가면 아시아 땅으로 이어집니다. 로마인들이 놓은 이 길을 ‘에그나티아 길’(Via Egnatia)이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이탈리아 남쪽 도시 브린디시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길은 ‘아피아 길’(Via Apia)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 제2의 도시로 테살로니키라고 부르는 테살로니카는 당시 마케도니아를 관통하는 ‘비아 에그나티아’의 중심에 있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 만큼 유다인들의 회당도 있었지요. 안식일이 되자 바오로는 회당으로 유다인들을 찾아가 토론을 벌입니다. 이는 바오로가 늘 하던 방식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선포하고 있는 예수님이 성경에서 고난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그 메시아시라고 열변을 토합니다. 세 안식일에 걸쳐 바오로가 복음을 선포하고 또 유다인들과 토론을 벌이자 감복한 사람들이 생겨나 바오로와 실라스를 따릅니다. 유다교로 개종해 하느님을 섬기던 많은 그리스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도 바오로 일행을 따릅니다.(17,2-4) 그런데 유다인들 가운데는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량배들을 데려다가 군중을 선동해서 도시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지요. 그러면서 바오로 일행을 찾아 끌어내려고 야손의 집으로 몰려갑니다.(17,5) 사도행전 저자는 야손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만, 그는 테살로니카에 살던 유다인으로서 바오로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바오를 따르게 된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야손의 집에서 바오로 일행을 찾아내지 못하자 야손을 비롯한 형제들, 곧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 몇 사람을 시 당국자에게 끌고 가 고발합니다. 고발 내용은 “온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 테살로니카에 왔는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는 것과 그자들이 “예수라는 또 다른 임금이 있다고 말하면서 황제의 법령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 당국자들은 보석금을 받고서 야손과 나머지 사람들을 풀어줍니다.(17,6-9) 이 고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 세상에 소란을 일으키던 자들”이라는 표현에는 유다인들이 이미 바오로 일행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유다인들이 “시기하여”(17,5) 불량배를 동원해 도시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하지만, 고발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로서는 바오로가 골칫거리라는 것을 이미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라는 다른 임금이 있다면서 황제의 법령을 어기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테살로니카 시 당국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고발을 심각하고 중대하게 여겼다면 보석금을 받고 풀어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베로이아 선교(17,10-15) 야손을 비롯해 붙잡혔던 형제들이 풀려나기는 했지만, 테살로니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그날 밤으로 바오로와 실라스를 베로이아로 보냅니다. 베로이아는 테살로니카에서 서쪽으로 70㎞쯤 떨어진 고대 도시입니다. 당시에는 여러 민족과 종교가 뒤섞여 있던 국제적인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유다인 회당도 있었을 것입니다. 형제들이 바오로 일행을 베로이아로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오로는 베로이아에 도착해서 유다인 회당으로 갑니다.(17,10) 사도행전 저자는 베로이아의 유다인들이 테살로니카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바오로가 전한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많은 유다인이 또 지체 높은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은 이가 믿게 됐다고 기록합니다.(17,11-12) 하지만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베로이아까지 가서 군중을 선동합니다. 위험을 느낀 형제들은 바오로를 바닷가로 보내고는 아테네까지 인도합니다. 바오로와 함께 지내던 실라스와 티모테오는 테살로니카에 그냥 남았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을 아테네로 인도해준 형제들을 통해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17,13-15) 생각해봅시다 바오로는 1차 선교 여행 때 가는 도시마다 유다인들에게 시달림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도 그랬고, 이코니온에서도 그랬습니다. 리스트라에서는 돌질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2차 선교 여행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필리피에서는 사정이 조금 달랐지만, 테살로니카와 베로이아에서 바오로는 역시 유다인들에게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왜 바오로는 이렇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먼저 유다인 회당을 찾아 말씀을 전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려주는 단초를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족 사랑’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 9,3) 바오로에게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박해를 당하면서도 유다인들에게 먼저 말씀을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점도 고려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데도 고려해야 할 점들이 아닐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월 5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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