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의 창조,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 뭐라꼬예?’를 시작하면서 성경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과 메시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대개 약속과 위로와 사랑과 견책과 경고가 그 내용이지요. 이러한 성경의 이야기들 속에서 하느님께서 지금의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지금 이 자리의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관심을 기울여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의 주요사건 구약성경은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요한 세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우리들 마음속에서도 분명하고 확고하게 간직해야 할 일들이지요. 첫째는 기원전 1250년경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사건이지요.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만 같았던 고난의 때에 그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자유를 찾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기원전 1000년경의 ‘다윗의 통치’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정의로운 통치로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충성을 받았던 다윗’ 치하에서 국가적인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백성들은 훗날 불의한 왕들의 지배 하에서 다윗 통치시대를 회상하며 모범적인 다윗왕과 같은 또 다른 왕, 즉 ‘새로운 다윗’을 희망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과 그의 도성 예루살렘은 예언자들과 백성들이 마음속에 희망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은 메시아, 곧 ‘그리스도’, ‘구세주를 향한 기다림’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기원전 587-538년에 있었던 ‘유배사건’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가 끝나자 국가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었는데, 북왕국은 2백 년 동안을 독립국가로 있다가 앗시리아에게 정복당하였고, 남왕국은 4백 년 동안 존속하다가 바빌론에게 정복되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이 성도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수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아간 것이 바빌론 유배의 시작이었죠. 유배를 통한 정화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은 약 40년 동안 유배지에서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자칫 바빌론 문화에 흡수될 위험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유배의 시간이 오히려 자신들을 위한 정화의 기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우리들도 지금의 삶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깊은 반성으로 보내고, 자신의 신앙을 정화하는 시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배려 속에서 바빌론을 쳐부순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도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고레스 덕분으로 유배지를 떠나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고, 새로운 성전을 재건하게 된 것이지요. (유배시기를 지나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자신도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어내고 ‘새로운 출애굽’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위기에 빠진 형제자매들도 정화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출애굽’을 성원합시다!) 유배기간 중에 편집된 창세기 앞서 본대로 기원전 587-538년에 있었던 ‘유배사건’은 기원전 1250년경의 ‘출애굽 사건’, 기원전 1000년경의 ‘다윗의 통치’와 더불어 하느님 백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의 한 가지였습니다. 약 40년 동안 유배지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기간은 정화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 유배기간 중에 본격적으로 엮어지기 시작한 책이 바로 성경의 첫 부분인 ‘창세기’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굳이 창세기를 쓸 필요가 없었는데,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창세기가 생겨난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학설에 의하면, 창세기는 기원전 550년에서 450년 사이에 – 곧 유배기간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까지 –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온 여러 작품들(야훼계, 엘로힘계, 제관계 문헌)을 모으고 엮어서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입니다. 조화로웠던 시초의 세상 창세기 1,2장에 의하면, 세상의 시작 무렵에는 하느님과 인간 및 여타 피조물 사이에 모든 것이 조화로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체험하고 있는 부조화와 무질서, 미움과 죄악의 현실이 ‘처음부터 혹은 원래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방식이 아니었다’, 혹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충실을 믿은 창세기의 저자들은 ‘하느님께서 시초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조화롭게 창조하셨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 인생살이에서 세상에 많은 부조화와 잘못이 함께 하고 있음을 체험하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섭리하시는 어떤 질서가 이 세상에 있음을 알고 있지 않는가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느님의 나라의 싹을 심고 틔어주셔서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자라고 있음을, 그리고 언젠가는 완성될 것임을 믿고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된 세상의 선(善)함 세상의 죄가 우리 사람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여전히 선한 것입니다! 사람의 힘든 노고가 따르면 땅은 소출을 내는 것이고, 사람이 하느님의 법을 따를 때, 땅은 더 풍성한 열매를 맺는 법 아닙니까? (세상에 내재하는 무질서와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하느님의 도우심 안에서 그분의 선하심과 인간과 세상의 선함을 찾아내도록 합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고, 더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고 행하고자 노력하는 레지오 단원들이 됩시다!) 하느님의 휴식과 인간의 휴식 기원전 550년에서 450년 사이에, 곧 유배기간에서 시작하여 그 이전부터 존재해 온 여러 작품들을 모으고 엮어서 최종적으로 편집된 것이 창세기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1,2장은 세상의 시작 무렵에는 하느님과 인간 및 여타 피조물 사이에 모든 것이 조화로운 상태에 있었음을, 당시 사람들이 체험한 부조화와 무질서, 미움과 죄악의 현실이 ‘처음부터 (원래)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방식이 아니었음’을, 혹은 ‘될 수가 없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목에서 주목해야 할 첫째 사항이 창세기 1,2장의 구성이 ‘한 주간의 일곱 날’에 맞추어져 짜여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그 글의 전체 흐름이 ‘하느님의 휴식’을 향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3) 창세기 저자는 하느님의 휴식을 말하며 우리 사람들이 휴식해야 하는 당위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곧 지혜로운 하느님의 사람은 엿새 동안을 일했으면 이렛날에는 쉬어야 함이 당연하다는 말이지요! 하느님 안식의 의미 창세기는 세상이 창조된 과정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쓰인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는 데에 사목적인 의미를 개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살이 중에도 안식일 규정에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을 거룩히 지내며 일찍이 그들을 이집트 종살이를 벗어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미하였고, 주님의 휴식을 함께 맛보게 되었다는데서 큰 행복을 느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8-11) 태초부터 인간은 땅을 가꾸고 일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 보였고, 오늘날에도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조물주 하느님과 더불어 성스러운 휴식을 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존엄하고 위대한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의미에서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는 것’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하는 그 일의 노예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번잡함에서 벗어나 고요함 중에 하느님을 찾을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잘 준비하는 길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씀의 의미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시기 전에 하셨다는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1,4)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0.12.18.21.24.)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1,31) 창세기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일을 다섯 차례나 ‘좋았다’고 하셨고, 여섯 번째는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러한 표현으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만족히 여기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의 의도는 “우리가 유배중인 상황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끝끝내 버리실 리는 없다!” “바빌론과 같은 대 제국들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하심과 다스림 속에 있다!” “지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벌하시고 정화하시는 시련의 기간이니 달게 받아들이자!” 이런 것 아닐까요? ‘참 좋았다’라는 말은 ‘훌륭하다’는 말이고 ‘완벽하다’는 말이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속에 ‘조화와 질서가 내재’해 있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위대한 뜻과 의도가 함께’ 하고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즉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에 따라’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과 우리 사람들 사이에는 ‘조화로움과 질서정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선을 보시고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다른 형제·자매들 안에서 좋은 점, 긍정적인 면들을 보기보다 나쁜 점, 마음에 들지 않는 점, 부정적인 면들을 먼저 보는 것은 아닌지요? 보기만 하면 다행일 것인데, 그를 비판하고 뒷담화하고, 다른 이들 앞에서 험담까지 하는 건 아닌지요? 다른 이들의 선한 면을 볼 수 있는 우리 레지오 단원들 되었으면 합니다. 결정적일 때까지는 판단을 유보합시다! 될 수 있는 대로 긍정적으로 좋게 생각합시다! 하나라도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으로 그를 칭찬합시다! 단원들끼리 서로 칭찬하여 서로에게 힘이 되는 쁘레시디움이 됩시다! 제발 쉽게 내뱉는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맙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1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대구 Se.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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