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선택에 따른 짐과 행복(Last und Glück der Erwählung) 이사야 예언서에서 ‘주님의 종의 노래’로 불리는 텍스트는 성서학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네 개입니다. 곧 이사야서 42장 1-4절, 49장 1-6절, 50장 4-9절 그리고 52장 13절-53장 12절이 바로 그것이지요. 신학적으로 커다란 중요성을 지닌 이 네 개의 노래는 모두 하느님께 선택받은 ‘주님의 종’에 관한 것입니다. 이 종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의 종 이스라엘 이 ‘종’은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곧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끌려간 유다인들은 그처럼 엄청난 재앙에 대해 당연히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끝장난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는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약속의 땅은 폐허가 되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성전도 없다. 더 이상 토라의 말씀들을 지킬 수도 없게 되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난 것인가?’ 이 때 한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알 수 없지만, 그는 이전의 예언자인 이사야의 전통과 힘에 의거하여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성서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제2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버리신 게 아니다. 너희를 잊으신 게 아니다. 그분은 너희에게 특별한 임무를, 그야말로 결정적인 임무를 맡기기로 작정하셨다. 너희는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선택되었다. 너희는 하느님 손에 들린 특별한 도구이다. 너희야말로 ‘주님의 종’이다. 수백 년 후에 교회는 이 종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정당합니다. 이스라엘을 두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예수님 안에서 모두 압축적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희망이 그 목표에 도달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실현이고 총화이십니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시작 부분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 이스라엘을 말하자면 공개적으로 소개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이사 42,1) 여기서 바로 ‘선택받은 이’ 또는 ‘선택’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라는 개념은 네 개의 모든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이룹니다. 마치 중요한 실마리처럼 네 개의 텍스트를 관통합니다. 나중에 초기 교회의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 선택의 개념을 받아들여 자기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들’ ‘부르심 받은 이들’ ‘선택된 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선택’ ‘선택받음’ ‘선택된 사람이 된다’라는 말들은 우리에게 고민을 안겨다줍니다. 많은 이가 그런 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에 담긴 의미 역시 꺼려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하고 말한다면, 개인적으로 상당히 곤혹스러워 할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말에는 나쁜 어감이 서려 있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이 말은 소수의 이단 분파나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인들이 스스로를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여기는 것 자체에 대해 많은 사람이 경멸과 조롱을 보냅니다. 자신이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말하는 이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습니다. ‘선택’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어려움을 주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본래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선호 사상? 첫째,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한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분이 다만 이 한 민족만을 사랑하시고 다른 민족들은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모든 민족의 행복과 구원을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행복과 구원은, 분명하게 구분된 한 백성 안에서 우선 먼저 보일 수 있게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모든 민족들도 똑같은 길을 자유롭게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선택은 하느님께서 어느 특정한 한 민족을 ‘선호’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세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는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둘째, 선택은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 낫다는 뜻도 아닙니다. 물론 그 백성은 그래야 합니다. 곧 하느님 백성은 온전히 ‘주님의 종’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백성 안에는 죄와 잘못도 있고, 과오로 서로 깊이 얽혀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들과는 다른 하느님 백성만의 본질적인 차별성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무엇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떻게 해야 세상이 마침내 평화를 찾을 수 있는지를 하느님 백성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을 널리 전파하는 것, 자신의 온 존재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선택에 따른 짐 셋째, 선택은 선택받는 것을 통해 그 삶이 이제 더 수월하고 더 간단하게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선택받은 이는 더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달리 말해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고, 길을 찾는 이들에게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선택받은 이는 말하자면 특히 더 엄중하게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게다가 더 나아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은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의 임무 앞에서 늘 거듭 귀머거리처럼 듣지 않고,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격렬한 저항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려 합니다. 그러다가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처럼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사 49,4) 이런 비슷한 말을 가끔씩 우리도 속으로 한 적은 없을까요? 물론 그런 말이 속에서 올라온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종이 그랬듯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4) 달리 말해,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는 외적인 성공에 의해 평가받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수고에 딸린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아십니다. 하느님 자신이 우리의 보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로써 명확해졌으리라고 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계획을 누구나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이해하는 것은 늘 다만 소수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소수에게 소명의 짐이 부과됩니다. 그 짐은 무겁고, 이 몇 안 되는 이들이 그 짐을 진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 짐을 질 수 있던 유일한 사람이 그 짐을 스스로 져야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마지막에 그분은 오롯이 혼자였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분이 몸소 선택하셨던 제자들마저도 마지막에는 대부분 도망치고 맙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합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혼자이셨고, 당신 십자가를, 선택에 따른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셨습니다. 선택받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이들 가운데 그 순간에 남은 것은 오로지 한 사람, 그분뿐이셨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그분에게 달렸습니다. 그분에게 이제 온 세상의 행복이 달렸습니다. 그분이 세상의 짐을 지셨습니다. 그분이 이제 온전히, 최종적으로, 영원히 참된 ‘주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그분이 도망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선택에 따른 짐을 벗어 던지지 않으셨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이 새롭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세상의 짐을 자신의 어깨 위에 나누어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곧 자유로운 결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한 이는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선택에 따른 행복 선택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짐이자 끊임없는 책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행복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삶에서 가장 큰 행복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종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게 더 큰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그에게 응답하십니다. 곧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구원이 더 크고 중요합니다.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를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구절은 먼저, 유일무이하게 선택받은 분이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 안에 머무를’ 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감히,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작은 봉사를 통해서도 세상에서 당신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어도 됩니다. 우리는 커다란 기계의 작은 부속품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딸로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우리를 당신의 협력자로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생활성서, 2020년 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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