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담과 하와 (1) 인간의 창조 이야기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데, 1장은 하느님께서 창조의 정점이요 완성인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셨다고 전합니다(1,27). 유다교 스승인 랍비들의 창세기 해석인 창세기 랍바는 천사들이 아담을 하느님으로 착각할 정도로 모습이 닮았다고 합니다. 모습은 히브리어로 첼렘인데, 유사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유사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첼렘은 외적 유사함이 아니라 내적 유사함을 가리킵니다. 유다 전승을 집대성한 탈무드는 이 말이 인간이 하느님처럼 창조하는 존재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지 않으신 신발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따르면 하느님의 모습은 기억력과 지성과 사랑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인간이 세상을 관리하고 보살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모습을 자유의지로 해석합니다. 이 자유의지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어 인간이 하느님께 단순히 복종하는 것뿐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게도 해 주지만,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창조주를 거스르게도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인간이 창조의 중심으로 나옵니다. 사람이 없이는 하늘에서 비도 내리지 않고, 땅에 풀 한 포기 없습니다(2,5). 그것을 사용하고, 가꾸고, 누릴 인간이 생긴 뒤에야 모든 것이 생겨납니다. 땅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었음에도 그 위에 어떤 생명체도 없습니다(2,6). 이 물은 오직 흙을 적셔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흙은 아다마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만든 첫 인간의 이름이 아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먼지로 만드셨습니다.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든 인간에게 당신의 영(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에는 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을 불어넣으심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아니면 인간은 흙먼지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남자에 이어 여자가 창조됩니다. 중세의 랍비 라쉬는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하느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첫 번째로 생겨난 인간의 관계는 남녀가 맺는 혼인입니다. 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는 ‘알맞은 협력자’(2,18)입니다. 서로에게 걸맞은 동등한 협력자라는 말입니다. 협력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제르인데, 이 단어는 하느님께도 사용되어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에제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니 협력자는 종속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뭇 피조물들 가운데서는 이러한 협력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 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인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담과 하와 (2) 첫 여인의 이름은 하와인데,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하와는 그리스어 성경에서 헤우아로, 라틴어 성경에서는 에바(Eva)로 번역된 뒤 영어 성경에서는 이브(Eve)로 옮겨졌습니다. 창세기 랍바는 하느님께서 여자를 만드실 때 그가 거만하지 않도록 남자의 머리뼈를 사용하지 않고, 요부(妖婦)가 되지 않도록 눈을 사용하지 않고, 엿듣기를 좋아하지 않도록 귀를 사용하지 않고, 남의 험담을 즐기지 않도록 입을 사용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도록 심장을 사용하지 않고, 손버릇이 나쁘지 않도록 손을 사용하지 않고,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도록 발을 사용하지 않고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지만, 하느님의 의도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갈비뼈는 사람이 섰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이며, 심장, 폐, 간, 등의 중요 장기를 보호합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그를 돕는 협력자라는 의미입니다. 참고로, 수메르어로 갈빗대는 티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단어는 틸입니다. 고대 수메르인들은 생명이 갈빗대에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이 맥락에서 남자와 여자는 생명을 함께 나눈 존재입니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기 2,23)라는 표현은 우리말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히브리어로는 남자는 이쉬, 여자는 이샤로서 두 단어는 같은 말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본질이 같음을 말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도 남자와 여자는 같은 ‘뼈와 살’을 나누었으니 동등한 영예가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둘 다 이쉬가 아니라 하나는 이쉬요 다른 하나는 이샤인 것은 둘 사이에 차이가 있음도 드러냅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처럼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첫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을 어기는 죄를 짓습니다. 먼저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그다음에 아담이 하와가 주는 열매를 받아먹습니다. [2020년 1월 12일 주님 세례 축일 가톨릭 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인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담과 하와 (3) 교부들은 뱀이 먼저 여자에게 접근한 이유를 여자가 남자보다 유혹에 약하며 잘 속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랍비들은 하와와 뱀(사탄)이 동시에 창조되었다고 하며 둘을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고대에 여자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흔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온갖 불행이 담겨있는 상자의 뚜껑을 여는 사고를 친 인물이 판도라라는 여자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부당하게 보입니다. 뱀은 고대로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이었기에 아이를 낳는 여인에게 더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남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 뱀이 여자에게 먼저 접근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저 혼자 먹지 않고 아담에게도 줍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아담에게 건넨 이유에 대해 유다 성경 해석인 미드라시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 죽을 운명에 처한 하와가 자기가 죽은 뒤 아담이 새 장가를 갈 것을 걱정하여 그도 함께 죽게 하려고 선악과를 건넸다고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하와는 어지간히 밉보인 것 같습니다. 구약 외경 아담과 하와의 생애는 아담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도 후손들까지 고통과 죽음을 겪게 한 하와 탓을 하며 원망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하와에게 지나친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와는 좋은 것을 아담과 나누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책임은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창세기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직접 들은 이가 하와가 아니라 아담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2,17).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를 묻는 하느님의 질문에 아담과 하와는 자기 죄를 뉘우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아담은 단지 하와에게뿐 아니라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3,12)라고 말하며 하느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하고,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뱀은 배로 기어 다녀야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굴욕과 복종을 표현합니다. 여자가 출산하여 인간이 번성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었는데 이제는 고통스러운 행위가 됩니다. 남자와의 알맞은 협력자 관계도 깨집니다(3,16). 처음에 땅을 돌보는 일은 축복으로 주어졌는데, 이제 남자는 땅에서 고생해야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2020년 1월 19일 연중 제2주일 가톨릭 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인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아담과 하와 (4) 유다인들은 쫓겨난 에덴동산을 항상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을 근거로 에덴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믿어 예루살렘 성전을 동쪽으로 향하도록 건설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른쪽은 좋고 왼쪽은 나쁘다는 관념이 생겨났습니다. 동쪽을 보고 있는 성전에 서면 오른쪽은 남쪽, 왼쪽은 북쪽이 됩니다. 오른쪽과 왼쪽은 각각 따뜻하고 풍요로운 남쪽과 춥고 황량한 북쪽을 가리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쪽은 좋은 것, 왼쪽은 나쁜 것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불러온 어둠 속에도 하느님의 자비의 빛이 비칩니다. 창세기 3,15은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불립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여자는 성모님이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때가 되면 당신 아들을 성모님에게서 태어나게 하셔서 사탄을 제압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생명 나무 자체가 되시어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온 죽음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죄를 짓고 낙원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에게 나뭇잎으로 만든 조악한 옷 대신 거칠고 험한 광야에서도 견딜 수 있는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히시는 데서도 드러납니다(3,21). 창세기 5,5은 아담이 930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2,17에서 하느님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 죽을 것이라 하신 말씀과 맞지 않죠. 외경 희년서는 하느님께는 천년이 하루와 같기에(시편 90,4 참조) 천년 넘게 살지 못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날 죽은 것과 같다고 해석합니다. 하와의 죽음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외경 아담과 하와의 생애는 아담이 죽은 지 6일째 하와가 죽었다고 전합니다. [2020년 1월 26일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 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인계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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