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52)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거쳐 트로아스로(사도 20,1-12)
트로아스 신자들과 빵을 떼어 나누고 죽은 청년 되살리다 -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트로아스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건너가 코린토까지 갔다가 다시 마케도니아의 필리피를 통해 사모스 섬 앞 내륙 항구도시 밀레토스까지 온다. 사진은 바오로가 2차, 3차 선교 여행 때 들른 마케도니아 지방 필리피 유적. 은장이 데메트리오스로 인한 소동이 가라앉은 후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로 갔다가 다시 마케도니아를 거쳐 트로아스로 갑니다. 트로아스에서는 젊은이를 되살리는 이적을 행합니다. 그 여정을 좀더 들여다봅니다.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로 간 바오로(20,1-6) 소동이 진정되자 바오로는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작별 인사를 한 후 마케도니아로 가려고 길을 떠납니다. 그곳 지방들을 거쳐 가는 동안에 신자들을 여러 가지 말로 격려하면서 그리스까지 갑니다.(20,1-2)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마케도니아까지 바로 배를 타고 간 것이 아니라 육로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가 트로아스까지 가서 그곳에서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간 것이 분명합니다.(2코린 2,12-13 참조) 마케도니아로 건너간 바오로는 필리피와 테살로니카, 베로이아를 거쳐 그리스까지 갔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그리스에서 석 달을 머무릅니다.(20,3ㄱ) 학자들은 석 달 동안 바오로가 주로 코린토에서 체류했고, 그 기간에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썼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 석 달을 머무른 바오로는 배를 타고 시리아로 건너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배를 타고 가는 도중에 유다인들이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아챈 것입니다.(20,3ㄴ) 코린토는 바오로가 2차 선교 여행 때 2년 이상 머물면서 선교했던 곳입니다. 코린토에는 회당장 크리스포스나 가이오스처럼 제자가 되어 충실한 협력자가 된 아들도 있었지만, 바오로에게 반감을 품고 그를 재판정으로 끌고 간 유다인들도 있었습니다.(18,1-17 참조) 바로 이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해칠 음모를 꾸몄을 것입니다. 마케도니아를 거쳐 시리아로 향하는 바오로와 동행한 사람들은 베로이아 사람 피로스의 아들 소파테르, 테살로니카 사람 아리스타르코스와 세쿤두스, 데르베 사람 가이오스, 티모테오, 아시아 사람 티키코스와 트로피모스였습니다.(20,4) 베로이아와 테살로니카는 마케도니아 지방 도시들이고, 데르베는 오늘날의 터키 중남부 지방의 도시입니다. 바오로가 1차 또는 2차 선교 여행 때에 거쳐 가며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바오로보다 먼저 트로아스에 가서 기다렸고, 사도행전 저자가 “우리”라고 표현한, 바오로와 그의 또 다른 동행들은 무교절이 지난 후 필리피에서 배를 타고 닷새 만에 트로아스로 건너가 그들과 합류해 이레 동안 지냅니다.(20,5-6) 에우티코스를 되살리다(20,7-12) 이렇게 합류한 바오로와 동행들은 트로아스에서 “주간 첫날에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입니다.(20,7ㄱ) 사도행전에서 유일하게 이 대목에만 나오는 ‘주간 첫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안식일 다음날을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주일이지요. 빵을 떼어 나누려고 모였다는 것은 성찬례를 거행하려고 모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모인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에서 함께 온 바오로의 동행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로아스의 신자들도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는 성찬례에 참여하고 바오로에게서 이야기도 들으려고 모인 것입니다.(20,7ㄴ) 사람들은 모두 위층 방 곧 그 집에서 가장 높은 3층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우티코스라는 젊은이가 창문에 걸터앉아서 바오로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가 잠에 빠져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내려가 보니 이미 죽어 있었지요.(20,9-10) 바오로가 내려가서 엎드려 그를 끌어안고는 “걱정하지들 마십시오. 살았습니다” 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러고는 다시 올라가서 “빵을 떼어 나누고 또 식사를 한 다음”(20,11)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하고는 떠납니다. 빵을 떼어 나누고 식사를 했다는 것은 성찬례를 거행한 후 친교의 음식을 나눴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사람들은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면서 크게 위로를 받았다”(20,12)는 말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바오로가 트로아스에서 청년을 되살린 이 이야기는 베드로가 야포에서 도르카스라는 여제자를 되살린 이야기(9,36-42)를 떠올리게 합니다. 트로아스에서 밀레토스까지(20,13-16) 바오로를 제외한 일행은 트로아스에서 남쪽으로 30여㎞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 아쏘스까지 배를 타고 갑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바오로를 기다렸다가 육로를 따라온 바오로를 만나 배에 태워 미틸레네로 갑니다.(20,13-14) 미틸레네는 아쏘스 남쪽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 있는 고대 항구도시입니다. 이튿날 일행은 미틸레네에서 다시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키오스 섬 앞바다를 거쳐 사모스 섬에 들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밀레토스에 다다르지요.(20,15) 밀레토스는 에페소에서 40여㎞ 남쪽으로 떨어져 있는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평원으로 바뀌었고 옛 로마 시대의 유적이 더러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에페소 인근까지 왔다면 자신이 3년 동안이나 지냈던 에페소에 들를 만했지만, 바오로는 에페소를 지나칩니다. 사도행전 저자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고” 그랬다고 설명하면서 “되도록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에 있으려고 서둘렀다”고 기록합니다.(20,16) 생각해봅시다 왜 바오로는 자신이 3년이나 머물렀던 에페소를 지나치고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에 있으려고 서둘렀을까요?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오로가 골수 바리사이 출신의 유다인이었기에 유다인 남자는 1년에 세 차례, 무교절(과월절)과 오순절(주간절)과 초막절(수확절)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해야 하고 안 되면 적어도 한 번은 순례해야 한다는 규정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페소에서 3년 동안 지내면서 겪은 지독한 환난으로 인해 에페소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는 이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짓눌린 나머지 살아날 가망도 없다고 여겼습니다.”(2코린 1,8) 하지만 이 이유 때문에 에페소를 그냥 지나치려 했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둘째 서간에서 계속해서 “그분(하느님)께서는 그 큰 죽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 주셨고 앞으로도 구해주실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 코린 1,10) 마지막으로,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석 달가량 머물면서 쓴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이 구제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하러 떠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로마 15,25-27) 바오로는 이 구제금을 전달하기 위해 배편으로 서둘러 떠나려 했으나 위험을 눈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서 가는 길을 택했고 시간이 지체되면서 서둘렀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오로는 3년이나 머물면서 선교했던 에페소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레토스에서 어떤 조치를 취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2월 23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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