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사랑, 십자가의 이름 - 코린토서 코린토서를 읽다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짠하다. 나 자신의 이야기인 듯싶어 불편하고 우리 이야기인 듯하여 짠하다. 사는 게 건조하고 단순해서인지 괜한 결기로 세상을 심판하듯 쳐다보는 숨겨진 나의 옹졸함이 들춰져서 불편하고,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대변되고 태극기와 촛불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극심한 대립이 코린토 교회의 형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해서 짠하다. 코린토 교회는 다양한 신분과 문화, 그리고 종족이 어우러져 구성된 교회였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생각으로 얽혀 있다 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대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여 벌어지는 파벌주의와 그 파벌의 경쟁으로 상처받고 지친 이들의 나태한 삶과 일탈이 공동체의 질서를 더욱 어지럽게 한다. 사실 세상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돈이 많고, 볼 것이 많고, 경쟁도 심하지 않은가. 그러니 문제도 많을 수밖에. 코린토를 두고 대개의 해설서는 성적 타락, 우상 숭배, 철학의 혼재 등을 거론하며 그 동네의 무분별하고 무질서한 상황만 부각시키는 경향이 뚜렷하다. 코린토라는 말마디가 ‘코린티아조마이’, 곧 ‘매춘을 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동사에서 왔다는 설을 끄집어 내어 그 타락을 더욱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코린토는 사상적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한 곳이었고 당연히 올바른 삶과 행복하고 정의로운 삶에 대한 사회적 갈망과 폼나고 반듯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양식있는 개인의 욕망이 교차되어 나타난 곳이었다. 사회적 문제가 어지러이 불거진다 해서 그 사회를 타락 그 자체로 보는 이는 없을 터. 코린토서를 읽고 코린토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무엇보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코린토를 악한 도시로 치부한 채 사도 바오로를 헐리우드 영화의 주인공 마냥 세워놓고 복음 선포라는 무기로 악한 세상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유치하고 편협한 해석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코린토에 50년에서 52년 초까지 일 년 반 정도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설립했다고 추정된다. 거기서 바오로는 복음을 인간적 지식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로 선포하였다.(1코린 1,23-24; 2,1-5) 바오로가 코린토를 떠난 후 에페소에서 작성한 코린토서(55-56년경)는 신앙 공동체 안에 불거지는 문제를 십자가로 재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서로의 파벌 문제(1코린 1,10-17), 불륜과 우상 숭배(1코린 5장),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에 대한 문제(1코린 8-10), 성령의 은사에 대한 우월의식의 문제(1코린 12-14장) 등등을 이른바 ‘십자가 신학’으로 새롭게 조명한 것이 코린토서다. 대개 십자가를 희생이나 극기, 혹은 절제나 인내의 상징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에게 있어 십자가는 ‘하느님의 힘’이었고 ‘사랑의 결정체’였다.(1코린 2,5) 하느님의 힘을 세상의 힘과 대비시켜 색다르고 특이한 하느님만의 범접하지 못할 고유한 힘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하느님의 힘이 세상의 힘에 짓눌린 건 분명하다. 세상은 인간 예수로 오신 하느님을 어리석고 불편하게 생각했고, 그 하느님을 죽임으로 승리했다고 생각했다.(1코린 1,23.27) 세상이 약하다고 여기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강한 힘을 드러내는 것, 세상을 꺾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짓밟히는 것으로 세상을 껴안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다. 그래서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 ‘기대치 않은’ 사건이다. 메시아가 십자가의 어리석은 사건을 통해 세상을 구원했다는 것을 누가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기대와 가치, 그리고 신념을 무너뜨리는 ‘자유’의 자리다.(1코린 7,20-24) ‘내 것이 옳고 네 것은 틀렸다.’라고 강변하는 자리에,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적 단죄의 자리에, 사회적 당위와 관행의 정당성을 절대화하는 자리에 십자가는 얼마간의 여유와 배려를 이야기한다. 굳이 이것만이 아니라고, 굳이 너만이 옳지 않다고 말이다. 하여 십자가는 단절과 배척으로 점철된 인간의 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1코린 2,8) 서로 간의 자유와 배려를 외면한 채 제 잇속을 챙기는 데에 급급하고, 그런 이기적인 행태가 일반화되고 당연시되어 버린 세상의 민낯을 십자가는 제대로 들춰낸다. 코린토 교회 안에 등장한 파벌주의가 그 민낯의 대표적 예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를 설립하고 떠난 후 아폴로와 같은 선교사들이 그 뒤를 잇는다.(사도 18,24 참조) 말을 잘하고 논증에 힘이 있는 사람일수록 따르는 이가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1코린 3,5; 사도 19,1) 추종자들은 대개 자신들의 영웅을 신화화하는 데 열심이고 그 열심이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된 선민주의로 빠져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린다. 코린토서는 공동체 내의 차별과 분리를 예수님께서 당신을 내어주신 최후의 만찬을 통해 비판한다.(1코린 11,17-34) 먹고 마시는 일, 너무나 일상적이고 단순한 일 안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최후의 만찬의 참된 정신을 다시 되짚는다. 타인의 배고픔을 먼저 헤아리고 타인의 부족함을 기다려주고 품어주는 일, 그것만 실천한다면 십자가는 신앙 공동체 안에 하느님의 가장 강한 힘으로 작동한다. 저만의 배고픔을 채우는 데 급급한 오늘날, 행복이나 성공을 모조리 ‘돈 벌어야 돼!’ 라는 강박의 논리에 저당잡힌 오늘날, 타인을 배려한다는 생각은 머릿속 사변적 명제로 남아 실천하기 무척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떤 의미로 우리의 이기적인 죄를 드러내는 심판의 잣대이자 우리가 새롭게 살아가야 할 구원의 길이 된다. 그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먹고 마시는 일을 ‘같이’ 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코린토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편지 외에 적어도 두 개의 다른 편지가 더 있었으리라 추정된다.(1코린 5,9-11;2 코린 2,3-4; 7,8) 다른 두 개의 편지 중 하나는 ‘눈물의 편지’(2코린 10-13장으로 추정)라고 일컫는다. 사도의 눈물겨운 노력, 곧 십자가 안에 모두가 사랑 가득한 친교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은 역설적이게도 코린토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데 너무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2서에서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여러분이 나를 내세워 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지만, 결코 그 특출하다는 사도들보다 떨어지지 않습니다.”(2코린 12,11) 사도 바오로는 ‘특출난 사도’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세상이 알아주는 정연한 논리와 말재주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낮은 자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드러내고 싶었다. 사도 바오로는 제 몸에 박힌 ‘가시(‘가시’는 그리스말로 ‘스콜프스’인데 ‘기둥’, ‘말뚝’, ‘고통’ 나아가 ‘십자가’를 가리키기도 한다)’를 통해 ‘약함에서 강함’을 찾는 십자가의 사도가 되었다.(2코린 12,7-10) 코린토서를 읽는 신앙인은 ‘십자가’ 자리를 곱씹어 보아야 한다. 초대 교회는 ‘십자가로 죽어간 메시아’를 신앙 고백의 정수로 되뇌이고 되새겼다.(1코린 15,3 이하)오늘의 신앙인은 십자가의 자리에서 초대 교회를 다시 살아내는 숙제를 안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악하다고 탄식하기 전에 십자가 안에 함께 모인 형제가 바로 그 사람들임을 기억하는 일, 형제의 탓을 지적하기에 앞서 그 탓이 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되새기는 일, 그것이 십자가가 가장 강한 힘이 될 수 있는 조건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7) 사랑은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이고 십자가는 사랑을 나누기 위한 나 자신의 참회와 겸손의 자리다. [월간빛, 2020년 3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