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특집] 요한 묵시록은 어떤 책이며,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인장 받은 이 14만 4000명은 ‘모든 하느님 백성’ 상징적 표현 - 요한 묵시록은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달하는 책으로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대해야만 바르게 읽고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림은 1125년에 제작한 스페인 타울 성 클레멘스 성당의 프레스코화로,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 왕을 묘사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읽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책이라고 많은 신자가 말한다. 맞는 말이다. 요한 묵시록은 성경의 여느 책들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상징을 담은 ‘환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달하고 있는 책이어서 개인이 혼자서 요한 묵시록을 읽고 그 내용을 제대로, 올바르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항상 교회의 권위 있는 주석과 주해를 바탕으로 「요한 묵시록」을 대해야지만 이 책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어렵게만 느껴지는 요한 묵시록의 상징이나 내용이 알게 모르게 친숙한 것이 많다. 일례로 미사 영성체 예식 전에 사제가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하는 말씀도 바로 묵시록(19,1)에 나오는 예수님의 ‘칭호’이다. 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의 사목 표어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도 묵시록 22장 28절의 말씀이다. 신천지를 비롯한 유사 종교들이 요한 묵시록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현대인들을 현혹하고 있어 무엇보다 묵시록이 어떤 책인지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이 어떤 책인지 성서학자 허규 신부와 안소근 수녀, 성서신학자 박찬용 신부 등의 저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요한 묵시록은 어떤 책인가 요한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이면서 ‘환시’를 통해 종말에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를 전하는 책이다. 환시를 묘사하는 이야기 틀 안에서 종말의 구원을 강조하며 전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계시’ 또는 ‘묵시’ ‘묵시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성경 본문은 ‘아포칼립시스’(Αποκαλυφιs)이다. 아포칼립시스는 ‘가려져 있는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이다. 즉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교회는 요한 묵시록의 저자를 요한 사도라고 전통적으로 여겨오고 있다. 하지만 현대 성서학자들은 원래 팔레스티나 지역에 살다가 유다 전쟁(66~73년) 후 소아시아 지방으로 이주한 유다인 출신 순회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한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육화의 그리스도론이 중심인데 반해 요한 묵시록에는 육화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 요한 묵시록은 로마의 황제 숭배 의식이 강요되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말기의 박해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95년경에 쓰였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묵시문학 성경에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 묵시록이 묵시문학에 해당한다. 묵시문학에서는 한 인물에게 어떤 초월적인 내용이 전달된다. 그 내용은 시간적으로는 종말과 관련된 경우가 많고, 공간적으로는 천상의 세계를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또 계시받는 사람이 그 받은 내용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천사나 다른 어떤 존재가 해석해 주는 경우가 많다. 묵시문학은 예언서와 유사하지만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예언서에서도 환시가 나타난다. 아모스도 예레미아 예언자도 환시를 보았다. 또 예언서도 ‘주님의 날’인 종말에 관해 말한다. 구약의 아모스와 즈카르야, 말라키 예언자도 종말을 주장한다. 하지만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종말은 예언서의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예언서는 종말을 말하지만, 세상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말하는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의 종말은 현재의 세상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역사의 흐름이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묵시문학의 또 다른 특징은 상징을 통해 표현하고, 과거의 권위 있는 인물을 저자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통해 등장하는 여러 동물, 색깔과 숫자 등은 모두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에서는 실제 저자가 아닌 인물을 저자로 내세운다. 요한 묵시록도 마찬가지이다. 묵시문학은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함으로써 앞이 보이지 않는 현재를 하느님의 계획 일부로 이해하게 하는 데에 있다. 요한 묵시록 구성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23장)와 ‘환시들’ (4,122,5)로 구성돼 있다. 일곱 교회는 숫자 7의 상징성 때문에 소아시아 전체 교회의 신자를 뜻한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의 주된 내용은 첫째, ‘니콜라오스파’(묵시 2,6)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2,2), “사탄의 무리”(2,9),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2,14), “이제벨이라는 여자”(2,20), “사탄의 깊은 비밀”(2,24)로 우상 숭배를 조장하고 불륜을 저지른다. 둘째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공통으로 ‘사람의 아들’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는 계시를 전하는 분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승리하는 사람’에게, ‘믿음을 끝까지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을 보여준다. 일곱 교회에 약속했던 말씀이 종말과 함께 실현되는 것으로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의 4장부터는 서로 이어져 있는 환시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그 시작은 ‘어좌에 앉은 분’과 ‘어린양’에 대한 환시이다. 어린양은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상징이다. 이 어린양은 어좌에 앉은 분으로부터 봉인된 두루마리를 건네받는다. 이 봉인된 두루마리는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시작하고 종말을 향해가는 중요한 요소이다. 두루마리에는 세상의 재앙과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가 소개된다. 신천지를 비롯한 유사종교와 사이비종교에서 자주 인용하는 ‘선택받은 이들에 대한 환시’는 하느님의 인장을 받은 14만 4000명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온 것으로 표현된다. 우선 여기에 사용된 14만 4000이라는 숫자는 실제적인 의미가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 숫자는 두 번의 12와 1000으로(12×12×1000) 이뤄진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결국, 몇 명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장을 지닌 이들, 곧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구원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요한 묵시록 바르게 읽기」 저자 허규 신부는 “우리에게 재앙을 소개하고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이들이 우상숭배에 대한 강요와 박해에서도 신앙을 간직할 수 있도록 종말의 희망을 통해 위로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이 기록된 목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요한 묵시록의 저술 목적에 부합하도록 개별적인 내용과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요한 묵시록은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을 계시하는 책”이라고 강조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22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