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57) 바오로의 연설과 로마 시민권 행사(사도 22,1-30)
유다인들을 향해 회심 체험 전하며 해명하다 - 바오로는 로마 군사들의 진지로 올라가는 층계에서 유다인들을 향해 연설하며 자신의 행위를 해명한다. 해명 내용은 회심 체험에 관한 것이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벽. 예루살렘 성전 바깥뜰에서 안토니오 요새로 이어지는 층계에 서서 바오로가 백성에게 히브리 말로 연설합니다. 연설 도중에 유다인들이 소동을 부리고 로마 군사들이 바오로를 묶자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행사합니다. 연설 내용과 로마 시민권 행사 과정을 살펴봅니다. 바오로의 연설(22,1-21) 바오로는 히브리 말 곧 당시 유다인들이 일상어로 사용하던 아람어로 연설을 시작합니다. 연설은 ‘새로운 길’에 관한 바오로의 개인 체험, 곧 회심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의 회심 이야기는 9장에 이어서 여기가 두 번째로 나오지만, 바오로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회심 체험은 이 자리가 처음입니다. 바오로 자신이 표현하듯이 연설이 아니라 “해명”(22,1)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해명은 대략 네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첫 부분은 바오로의 출신과 회심 이전의 삶에 관한 내용입니다.(22,3-5) 바오로는 지금의 터키 땅인 소아시아 남부 로마 제국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유다인입니다. 출신으로 본다면 본토 유다인이 아니라 당시 로마 제국 도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인 이산(離散) 공동체, 곧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루살렘 도성에서 자랐고 유명한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에 따라 엄격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바리사이였습니다.(23,6 참조) 그는 나자렛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길’을 따르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고 대사제와 원로단으로부터 다마스쿠스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 올 수 있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둘째 부분은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입니다.(22,6-12) 정오쯤 다마스쿠스 가까이 이르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둘레를 비췄고 바오로는 땅바닥에 엎어집니다. 그리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려 누구시냐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바오로가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줄 것이다”라는 답변을 듣습니다. 바오로는 일행의 부축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갑니다.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9장 3-9절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지만 “정오쯤”이라는 시간 설명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는 바오로의 물음 등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셋째 부분은 다마스쿠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22,13-16).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바오로의 눈을 뜨게 해주면서 하느님께서 바오로를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바오로에게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 부분은 바오로가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서 본 환시 내용입니다.(22,17-21) 바오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 무아경에 빠져”(22,17) 보고 들은 것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바오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말씀과 바오로를 다른 민족들에게 보내겠다는 말씀이 주를 이룹니다. 이 부분은 회심 이후 바오로의 삶에 관한 9장의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로마 시민권 행사와 최고의회 출두(22,22-30) 그런데 바오로의 연설은 여기서 그치고 맙니다. 유다인들이 “저런 자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며 소리를 높여 고함을 지르고 겉옷을 벗어 내던지는 등 소동을 부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천인대장은 바오로를 진지 안으로 끌고 가서 채찍질로 신문하라고 지시합니다. 유다인들이 소리를 질러대는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22,22-24) 군사들이 채찍질을 하기 위해 가죽 끈으로 바오로를 단단히 묶습니다. 그러자 바오로가 곁에 선 백인대장에게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은 채 채찍질해도 되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바오로는 로마 시민이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시민에게는 매질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이 이 말을 천인대장에게 전하자, 천인대장이 직접 바오로에게 와서 “당신은 로마 시민이오?” 하고 묻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대답합니다. 천인대장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돈을 들여서 시민권을 얻었지만, 바오로는 윗대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서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한 것입니다.(22,25-28) 태생 로마 시민이라는 바오로의 말에 채찍질하며 바오로를 신문하려던 자들이 물러납니다. 또 천인대장은 자신의 지시로 부하들이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바오로를 쇠사슬로 결박한 일로(21,33) 두려워했습니다.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쇠사슬로 결박한 일이(22,29) 걸렸던 것입니다. 신분을 따진다면 바오로는 자기보다 높은 신분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천인대장은 이튿날 바오로를 풀어줍니다. 그러면서 왜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아보려고 최고의회를 소집하고는 바오로를 데리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웁니다.(22,30) 생각해봅시다 유다인들은 바오로의 해명을 듣다가 중간에서 막고는 “저런 자는 이 세상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소동을 부립니다. 이성적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바오로의 해명에서 유다인들이 그토록 광분해 할 까닭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의 해명은 말 그대로 많은 부분이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회심에 대해 정성을 다해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열성적인 유다인이고, 신자들을 박해했던 사람이고, 유다인들이 스테파노를 돌로 치고 죽일 때 그 일에 찬동했던 사람이라는 설명들이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이미 바오로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유다인들로서는 바오로의 진정성 있는 해명이 해명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오로의 해명을 모독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태도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 내가 반대하는 사람의 해명을 들을 때는 그 해명 자체의 진실성이나 진정성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편견이나 선입견에 치우쳐 있으면 해명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는 이런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들을 귀”(루카 8,8)를 가지고 들을 수 있는 지혜와 열린 마음을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29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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