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평화는 ‘기쁨’을 준다면 세속의 평화는 ‘즐김’을 주는 것일 게다. 기쁨은 맛볼수록 더 누리고 싶지만 즐김은 맛볼수록 더 누리기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단다. 주위의 약한 자를 하루 종일 도와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그 기쁨은 몸은 비록 피곤하지만 삶의 큰 보람이라 또다시 봉사하고 싶은 기쁨이지만, 고스톱을 밤샘해 돈은 좀 땄지만 몸이 피곤해 ‘또 해 볼가?’에 의아심이 생긴다면 그건 즐김이리라. 따라서 하느님의 평화는 계속되는 기쁨을 줄 것이고, 세속의 평화는 몸도 지치고 패가망신이 되는 꼴일 게다. 우리는 세속의 것보다 하느님의 평화를 추구해야만 한다. 오필제 님 하느님의 평화 누리세요. 감사합니다. ^^+
+ 찬미 예수님! 사실 신약 성경의 본문 중에는,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평화"라는 표현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별도의 시간을 내어 질문을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내용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7개의 서간 중 옥중 서간은 2개인데, 에페소 감옥에서 55년 경 쓴 것으로 추측되는 필리피서에 ‘하느님의 평화’에 관한 구체적 내용이 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4-7 참조)’ 우리 신앙인은 늘 하느님을 언제나 첫 번째로 두는 삶을 살아야겠군요. 그러면 하느님의 평화가 기쁨으로 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
아! 필리피서 4,7에 "하느님의 평화"라는 표현이 있군요... 굿뉴스 서버 제공의 성경 본문 검색 기능을 사용하여 확인 한 후에 위의 한줄답변을 작성하였는데, 지금 다시 검색을 해 보니 잡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한줄답변 직전의 확인 과정에서, 예를 들어, 입력 오류 등의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위의 한줄답변에서 말씀드렸듯이, "그리스도의 평화(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에 대한 글을 답글로 아래에 붙였습니다. 아직 완료된 글을 아니나, 원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글로서 읽을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아, 이거 말씀 안 드릴 수가 없군요. 세상의 평화는 욕망을 채우거나 욕망을 억누르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비해 하느님의 평화는 욕망과는 전혀 관계없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평화는 이러이러하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부정적(不定的)인 표현을 사용하여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다고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를 직접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열매를 보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은 먹고 마심으로써 평화를 얻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채워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자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가난한 사람의 욕망을 채워줌으로써 평화를 얻습니다. 전자를 동물적 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윤리적 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적 선과 윤리적 선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사람은 반드시 미래의 더 큰 욕망의 충족 또는 명예, 권력 등 다른 종류의 욕망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과 폭력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화는 물건이나 사람과는 관계없이 그 자체로 유효합니다. 즉,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3) :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은 먹고 마심으로써 평화를 얻습니다. 이것은 욕망을 채워서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자는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가난한 사람의 욕망을 채워줌으로써 평화를 얻습니다. 전자를 동물적 善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윤리적 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물적 선과 윤리적 선은 영원히 지속할 수 없습니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인 "윤리적 선"의 정의(definition)는 지금 말씀하신 바와 대단히 다릅니다.
남충희 님이 예를 들어 주신 윤리적 선은 욕망을 억누르는 세상의 평화의 한 단면을 ‘부자의 자선’을 예로 설명을 하셨네요. 그런데 이 ‘윤리적 선’의 ‘정의’가 가톨릭 교리서 등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정의(definition)와는 대단히 다르다.’라는 소순태 님의 견해는 정확히 왜 다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가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지금 주제는 윤리적 선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의 평화가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단한 구조로 밝힌 것뿐입니다. 욕망은 육체적 욕망(쾌락, 재물)과 정신적 욕망(명예, 권력)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평화(욕망의 충족)를 추구하지만 그 평화는 물질(쾌락과 재물)과 사람(명예와 권력)에게 의존합니다. 성령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사람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다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추구하면서 불화를 일으키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는 성령에서 오는 자유롭고 영원한 생명의 지혜로서 물질과 사람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다툼과 불화를 일으킬 가능성 자체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세속의 평화에 관해, 성령의 개입 여부로 명쾌하게 답변을 마무리시킨 것 같은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좋은 답변 주신 남충희 님 자주 이곳에 들려 주시길 빌면서, 감사를 드립니다. ^^+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4) : 지금 주제는 윤리적 선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의 평화가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단한 구조로 밝힌 것뿐입니다. 욕망은 육체적 욕망(쾌락, 재물)과 정신적 욕망(명예, 권력)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 갑자기 "윤리적 선" 운운 하더니, 답변치고는 초라하네요... 그리고, 욕망(desire)을 또 이상하게 구분하는데,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욕망(desire) 자체를 두고서 "윤리적 악"이라고 가르쳐오지 않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4) : 지금 주제는 윤리적 선이 아닙니다. 저는 세상의 평화가 욕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단한 구조로 밝힌 것뿐입니다. ] <----- 좀 말 되는 소리합시다.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5항의 첫 문장의 가르침과 완전히 충돌하는 주장이네요 : CCC 2305 지상의 평화는 메시아이시며 “평화의 군왕” (이사 9,5) 이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 열매이다.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5항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Earthly peace is the image and fruit of the peace of Christ, the messianic "Prince of Peace."
대꾸를 하지 말아야 되는데 교리서 몇 조라는 둥 하는 유식한 척하는 표현과 영어 나부랭이에 현혹되는 분이 계실까봐 코멘트합니다. '지상의 평화'라는게 복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평화'와 같은 것이라면 세상의 평화는 곧 하느님의 평화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교리서는 복음서가 헛소리라는 것을 가르치는가? 물론 복음서는 복(영적 생명)을 전하는 책이지 헛소리가 아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게 한심합니다. 이제 소순태님 마음대로 하세요.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5) : ... '지상의 평화'라는게 복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평화'와 같은 것이라면 세상의 평화는 곧 하느님의 평화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 교리서는 복음서가 헛소리라는 것을 가르치는가? ...] <----- 같은 것??? 어이구! "열매"라는 표현은 어디로 가고 없네요... "열매"가 무슨 뜻인지 모르니 이런 엉뚱한 말씀을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5) : ... 복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평화'와 같은 것이라면 ...] <----- 그리고 제가 알기로, "새 번역 성경"의 네 복음서들의 본문 중에 '세상의 평화'라는 표현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도의 평화", 즉, "하느님의 평화" 에 대한 전달의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2.htm
지금까지 질문이 무언지도 몰랐단 말이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요한복음14:27) '내가 주는 평화'=하느님의 평화, '세상이 주는 평화'=세상의 평화. 이제 됐어요, 소순태님? 어이구는 무슨 어이구. 허리 아파요? 말할 때마다 열매라는 표현을 써야 돼요? 그건 교리서 몇 조에 나옵니까?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압니다.(마태오 12:22) 사사건건 종주먹을 들이대며 말꼬투리를 잡는게 하느님의 평화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Of course, not!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5) : ... '세상이 주는 평화'=세상의 평화. 이제 됐어요, ...?] <----- 처음부터 똑바로 말씀하셨어야지요, 다음(----->)과 같은 왜곡/변조 마시고... : [남충희 (namchunghee) (2013/06/25) : ... 복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평화'와 같은 것이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