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소장의 사도행전 이야기] (60) 유다인들의 고발과 바오로의 변론(사도 24,1-27)
유다인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오로를 가둔 총독 - 카이사리아 펠릭스 총독 앞에서 변론하고 난 바오로는 그곳 감옥에서 2년을 보낸다. 사진은 카이사리아 해변의 헤로데 궁전터. 뒤편 바다와 연결된 부분이 유다 총독이 관저로 사용했던 헤로데 대왕 궁전 유적이다.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고발하고 바오로는 총독 앞에서 변론합니다. 그런 다음에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지냅니다. 유다인들의 고발(24,1-9) 바오로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한 지 닷새가 지나서 하나니아스 대사제가 예루살렘에서 카이사리아로 내려옵니다. 원로 몇 사람과 테르틸로스라는 법률가를 데리고 온 그는 펠릭스 총독에게 바오로에 대한 소송을 제기합니다.(24,1) 바오로가 불려 나오자 테르틸로스가 고발을 시작합니다. 테르틸로스는 먼저 펠릭스 총독에 대한 인사와 칭송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는 각하 덕분에 큰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하의 선견지명으로 이 민족을 위한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존귀하신 펠릭스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인정하며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24,2-3) 그런데 펠릭스 총독에 대한 이런 칭송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성경학자들은 지적합니다. 노예 출신으로 자유민이 돼 유다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의 지위에까지 오른 펠릭스는 “난폭하고 졸렬한 총독”(「주석 성경」)으로서 유다인들의 개혁과 평화에 기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안과 공포를 조성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가 총독으로 다스리던 기간에 폭동이 자주 일어났고,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그는 많은 이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테르틸로스는 이어 본격적으로 바오로를 고발합니다. 그의 고발 내용은 바오로가 ①“흑사병 같은 자로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자며 나자렛 분파의 괴수”이고 ②“성전까지 더럽히려고 시도해 우리가 붙잡았다”는 것입니다.(24,5-6) 나자렛 분파가 나자렛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보면, 그리스도 신자들의 우두머리로서 나자렛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서 유다인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고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이 바오로를 고발한 핵심 죄목입니다. 테르틸로스는 그런 다음에 이렇게 덧붙입니다. “각하께서 친히 이자를 신문해 보시면 우리가 이자를 고발하는 내용을 모두 아시게 될 것입니다.”(24,8) 그러자 다른 유다인들도 테르틸로스 말에 동조하고 나섭니다.(24,9) 일부 사본에는 ‘바오로를 붙잡았다’(24,6)와 ‘각하께서 신문해 보시면’(24,8) 사이에 “그리고 우리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리시아스 천인대장이 와서 이자를 우리 손에서 아주 난폭하게 빼앗아 데리고 가서는 이자를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각하 앞으로 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본의 내용까지 종합하면 바오로가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에서 카이사리아의 펠릭스 총독에게까지 와서 재판을 받게 됐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곧 나자렛 분파의 괴수인 바오로가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겼을 뿐 아니라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해 유다인들이 붙잡아 율법에 따라 재판하려 했으나 천인대장이 나서서 바오로를 데려가는 바람에 총독이 있는 이곳 카이사리아까지 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변론(24,10-21) 테르틸로스의 고발이 끝나자 바오로가 변론에 나섭니다. 먼저 총독에 대한 간단한 인사치레를 한 후에 본격적인 변론을 펼칩니다. 바오로가 펼친 변론은 이러했습니다. ①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이틀도 되지 않았고 성전에서든 회당에서든 도시 어디에서든 누구와 논쟁하거나 군중의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본 사람이 없으니 저들은 소요를 부추겼다는 고발을 증명하지 못한다. ② 나는 저들이 분파라고 말하는 ‘새로운 길’을 따르지만, 그 길에 따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을 섬기고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을 뿐 아니라 저들이 품고 있는 것과 똑같은 희망 곧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모두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③ 나는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쓴다. ④ 나는 동족에게 자선기금을 전달하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여러 해 만에 돌아왔다. ⑤ 내가 성전 안에 있었지만 정결 예식을 마치고 제물을 바칠 때였는데 그때 곁에는 군중도 없었고 소동도 없었다. ⑥ 아시아에서 온 유다인 몇 사람이 있었는데 내게 시비를 걸 일이 있으면 그들이 총독에게 와서 고발했어야 마땅하다. ⑦ 내가 최고 의회에 출두했을 때도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없다. 다만 죽은 이들의 부활 때문에 여러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한마디 외쳤을 따름이다.(24,11-21) 바오로가 펼친 변론에서 몇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재판 원칙에 관한 것으로 유죄는 증명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변론은 고발자들이 바오로가 유죄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 유다교와 ‘새로운 길’인 그리스도교와의 연속성입니다. 바오로는 새로운 길이 유다교와 무관한 또는 유다교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선 상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바오로의 변론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예수님 말씀을 반영합니다. 셋째, 부활에 대한 바오로의 언급입니다. 학자들은 유다교의 부활 신앙이 두 가지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봅니다. 하나는 의인들의 부활을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모든 사람의 부활을 믿고 있음을 표방합니다. 바오로는 또 자신이 죽은 이들의 부활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고 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소송이 순전히 유다교 내의 문제임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학자들은 풀이합니다. 총독의 조처(24,22-27) 펠릭스 총독은 바오로의 변론이 끝나자 천인대장 리시아스가 내려오면 사건을 판결하겠다면서 공판을 연기합니다. 그러면서 바오로를 편하게 해 주고 친지들이 그를 돌보는 것을 막지 말라고 백인대장에게 지시합니다.(24,22-23) 총독은 며칠 후 유다인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오로를 불러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관해 이야기를 듣다가 바오로가 “의로움과 절제와 다가오는 심판”에 관해 설명하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야기를 그만두게 합니다.(24,24-25) 펠릭스 총독의 세 번째 아내인 드루실라는 야고보 사도를 처형한 헤로데 아그리파 1세 임금(12,1-2)의 막내딸이었습니다. 드루실라는 에메사라는 왕국의 임금에게 시집갔는데 펠렉스 총독이 계략을 꾸며 자기 아내로 만들었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총독은 의로움이나 절제와는 관계가 먼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오로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총독은 이후에도 바오로를 자주 불러내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기보다는 돈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였습니다.(24,26) 바오로가 변론 과정에서 자선기금을 전하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고 말한 것을 듣고는 바오로에게 돈이 많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렇게 두 해가 흘렀고, 펠릭스 총독의 후임으로 포르키우스 페스투스가 부임합니다. 그때까지 바오로는 감옥에 갇혀 지냅니다. 펠릭스 총독이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오로를 가둔 채 내버려 둔 것입니다.(24,27)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4월 19일, 이창훈(한국평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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