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법없이 살기 - 로마서 60년대 미국 하버드 법대의 졸업식장, 한 졸업생이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지요. “우리의 거리들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는 중입니다. 러시아는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청중들은 이 연설에 박수로 화답했고, 박수소리가 잦아들 무렵, 그 졸업생은 말을 이어갑니다. “지금 말한 것들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당원들 앞에서 연설한 것입니다.” 히틀러의 잔인함이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테지요. 다만 기억할 것은 히틀러를 뽑아 세운 이들은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무찔러야 한다는 시대적 결기로 무장된 독일 국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세상을 무법천지로 만들고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지게 할 수 있다는 역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법이란 게 그렇습니다. 서민의 생각을 법조문에 담아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의 다른 생각을 죄다 담아내지도 못합니다. 법은 어찌되었건 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회지도자의 선택과 그 선택을 추종하는 다수의 국민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에게 법은 참 멀고도 낯선 ‘그들만의 리그’로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로마서를 읽을 때마다 법의 성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법’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는 로마서는 유다의 율법을 배격하고 오로지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편협한 맹신주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이른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기괴한 선언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의 ‘믿음’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연대의 가치를 담아냅니다.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유다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나고 로마 교회는 아직 뿌리가 채 내리지 못한 이방인 중심의 공동체가 됩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고 난 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로마 공동체는 이방 문화에 젖어 있었고 그런 모습을 본 유다인들은 예전 유다 문화 중심의 공동체로 돌아가길 원했지요. 유다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자연스러워졌고 교회 공동체는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58년경)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로마를 생각하며 편지를 작성합니다. 바오로는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믿음’의 가치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법은 서로에 대한 비판이나 단죄로 제 영역과 이념, 그리고 계급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데는 얼마간의 보탬이 되나, 서로의 생각이 달라 대립하고 단절된 이들의 일치와 연대를 위해선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3,19-20) ‘법대로 하라!’는 말만큼 차가운 인간 관계는 없을 테니까요. 믿음의 본디 가치는 법과 다른 차원의 해법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법의 외연을 넓혀 그 한계를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믿음은 법의 한계에 질문을 던집니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이게 최선입니까?’라는 질문을 법에 던지면서 더 넓은 세상과 더 많은 사람을 향해 달음질쳐 나아가는 게 믿음입니다. 바오로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특정 민족, 특정 계급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야말로 믿음의 본디 가치를 실제 살아간 인물 중 단연 최고봉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을 ‘거슬러’ 희망했습니다.(4,18. 우리말 번역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체인 아브라함은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가족과 민족과 신념에 관한 희망을 거슬러 하느님께서 가리키신 미지의 삶을 희망하며 묵묵히 살아갔지요. 어찌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이자 타자와 타지를 향한 쉼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믿음의 끝은 모든 이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대동단결의 세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많은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은 서로 다른 계급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화해의 삶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고 선포했습니다. 물론 그 화해의 여정은 예수님의 수난 사건 안에서 완성되었지요.(5,11)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의 아버지로 화해의 삶을 시작했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희생하여 화해의 삶을 끝마치셨습니다. 아브라함에서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여정은 거칠고 외로웠지만 그럼에도 따뜻하고 풍성한 만남을 어김없이 이어갔습니다. 믿음의 여정이 지나가는 궤적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거기서 우리는 의로움을 발견합니다. 바오로가 제시한 몇몇 구절은 믿음과 의로움이 날실과 씨실처럼 서로 엮이어 고운 무늬를 이뤄낸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3,2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15,7)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12,18) 한 개인의 삶은 소중하되, 개인으로 머물 때 우리는 진정한 믿음도, 의로움도 이뤄내지 못합니다. 의로움은 함께 나누는 저마다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깨치는 데서 시작합니다. 화해를 통한 평화로운 삶,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은 획일화된 규범이나 법규, 혹은 시대의 주류가 외치는 대중적 신념을 따르지 않습니다. 다름으로 갈등을 겪고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지언정, 사회라는 큰 마당에 서로의 생각을 던지고 공유하며 다듬고 나누는 ‘진지한 투쟁’의 실천이 평화와 거룩함과 의로운 삶의 근간입니다. 사회적 투쟁은 ‘빨갱이냐, 태극기냐’를 묻는 대립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아프지만 해야 할 사회 구성원의 책무입니다. 참되고 이성적이며 진실된 것을 찾아가는 예배와 같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12,1 ‘합당하다’라고 번역된 ‘로기코스’는 참되고 진실하며 이성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사회학자들은 근대의 시작을 ‘자유로운 개인의 출현’으로 봅니다. 법이나 권력에 짓눌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시대는 봉건시대였지요. 코로나19의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운 요즘, 우리는 근대에 사는가, 아니면 여전히 임금님을 모시는 봉건사회에 속하는가, 물어야 합니다. 빈곤한 자아정체성과 천박한 집단주의적 사고는 봉건 사회에서나 어울리지요. 사회가 한편에 서서 다른 편을 비난하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합법적인 것들에 저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단죄와 비판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법의 한계를 넘어 이웃과 사회를 챙기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7,12) 소극적인 절제가 아닌 적극적인 실천으로 타인을 향한 배려의 삶을 살아내는 것, 바로 믿음이고 법없이 살되 법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믿음이 의로움을 만나는 건, 서로 달라 내치고 비켜가고 피해가는 이들과 맞잡은 손이 헐거워지지 않도록 단단히 부여잡는 데서 시작합니다. [월간빛, 2020년 5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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