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 II’ 특집] 애가와 바룩서, 그리고 다니엘과 요나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애가와 바룩서는 전승에 의하면 애가는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간주되며, 바룩서의 저자로 알려진 바룩은 예레미야의 서기관으로 전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의 목록에서는 예레미야서 뒤에 애가와 바룩서가 등장합니다(아울러 바룩서의 마지막인 6장에서 예레미야의 편지가 위치합니다). 애가(哀歌)라는 말은 말 그대로 슬픔의 노래입니다. 무엇에 대한 슬픔일까요? 바로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비탄과 슬픔입니다. 애가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면 알파벳 시 구조를 가진 다섯 편의 노래 모음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정교하게 잘 편집된 작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 맞이한 참상을 기억하고자 외우기 쉽게 이러한 편집을 시도하였다고 합니다. 애가는 이름처럼 전체적으로 슬픔을 담고 있으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비극과 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이 다가온 이유는 계약에 충실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심판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애가서는 죄에 대하여 깨닫고 그 죄를 고백하는 내용을 담아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회개를 통해서 다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희망도 함께 노래합니다. 바룩서의 시작은 바룩이 바빌론에서 이 글을 쓴다고 알려줍니다(1,1). 바룩서가 강조하는 것은 유배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고, 주님의 계명과 말씀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백성의 죄를 그냥 놔두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께 돌아오면,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묵시문학입니다. 묵시문학이란, 일반적인 언어가 아닌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 상징, 꿈, 환시 등의 장치를 통해서 신앙을 이야기하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추구하는 작품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에 나오는 내용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보입니다만, 그 모든 것이 하느님과의 소통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의미를 지닌 다니엘(דניאל)의 활약을 들려주는 다니엘서는 전통적으로 바빌론으로 유배 간 다니엘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다니엘서가 유배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언서가 제작된 시기는 그보다 400년 정도 후인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시기(마카베오서와 비슷한 시기)로 바라봅니다. 다니엘서는 극심한 박해 시기에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잃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시문학적 기법을 통해서 전해줍니다. 다니엘서는 강조하는 것은 명확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과 진정한 역사의 통치자는 세상의 통치자들, 박해자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에서 주목할 점은 하느님께 충실했던 이들이 받게 되는 궁극적인 보상, 바로 구약에서 새롭게 소개되는 '부활'에 대한 내용입니다(다니 12,1-3). 부활은 의인에 대한 하느님의 정당한 보상이라는 사실이 다니엘서에서 언급됩니다. 요나 예언서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조금 구별이 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요나서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구성된 짧은 예언서입니다. 요나가 활약한 장소는 북이스라엘도, 남 유다 왕국이 아닌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뒤에 니네베가 멸망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러자 니네베의 임금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면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요나 예언서가 들려주는 바는 명확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소위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도 유효함을 알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닌 선민의식에 대한 거부이면서,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강조된 작품입니다. 예언서들이 보여주는 신학적 주제는 거의 비슷한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그분의 계명에 충실할 것을 알려줍니다. 그렇지 못하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은 백성의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자비의 하느님? 심판의 하느님? 지금 우리는 어떠한 하느님을 만나고 있나요? 조용히 예언서의 말씀에 비추어 물어봅시다. [2020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인천주보 3면, 박형순 바오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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