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과 축복 하느님이 맺으시는 계약: 의무보다도 축복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의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 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1.2.4.) 앞서 15장에서 전하는 ‘하느님과 아브람 사이의 계약’과 유사한 내용이지요. 보통 계약이라면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상호 의무를 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지만 여기서의 계약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계약금이나 보증금과 같은 특별한 요구조건이 없이 오로지 당신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로 장차 축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요구로서의 할례: 선택된 민족의 표징 물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10) ‘하느님께서 노아와 온 인류와 맺으신 계약’의 상징이 무지개라면, 할례(割禮, circumcision)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과 맺으신 계약’의 상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할례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위생상의 이유로 행해지는 포경수술에 해당하지요. 중동지역에서는 할례가 아직도 ‘혼인 입문 의식의 하나’로 치러지고 있는데, 이는 아브라함 당시에도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소년들이 혼인 적령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행해졌던 성인(成人) 의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여러 부족들에게 사춘기 의식으로 행해졌던 이 의식이 이스라엘 백성에겐 출생 후에 받아야 하는 의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즉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계약을 계기로 할례는 이스라엘이 선택된 민족에 속한다는 표징이 된 것이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요구되었다고 이해된 할례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친아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다른 종들’에게도 지켜야 할 계약의 내용이 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가 할례를 받으면] 내 계약이 너희 몸에 영원한 계약으로 새겨질 것이다.”(13)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이 아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의미가 담겨있을 말씀 아닐까요?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곧 내 안의 허물과 잘못, 욕망과 죄악을 벗겨내고 잘라내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민족들과 구별하는 아주 결정적이고 특징적인 표시가 바로 할례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합니까? 하느님을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서 나를 드러나게 할 특별한 무엇이 과연 나에게 있기나 한지요? 하느님을 신앙하는 사람은 할례의식과 같은 외적인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친절과 온유와 관용, 용서와 사랑과 같은 내적인 할례로써,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따뜻한 마음들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우리 단원은 더욱 특별한 사람입니다. 마리아의 군사로서 자신을 새롭게 다잡아 무장하는 우리가 됩시다!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창세 17.5) 왜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실 때 새로운 이름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신 걸까요? 고대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 이제 전과는 다르게 바뀐다는 것을 드러낸다 할 것입니다. (주변에 이런 생각으로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개명이 까다로웠지만 요즘에는 이상하지 않는 이름까지도 새 이름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쉬워진 모양입니다.) 서로 비슷한 이름인 ‘아브람’과 ‘아브라함’은 한 이름을 가리키는 두 가지 형태의 방언일 수도 있는데, 이들은 원래 ‘아버지(씨족의 수호신)는 존귀하시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라는 창세기의 표현을 고려하면, ‘아브라함’은 ‘아브 하몬’이란 말에서 의도적으로 붙여진(개명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히브리말로 ‘아브 하몬’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과연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은 장차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고, 나아가 ‘모든 신앙인들의 아버지요 조상’이 되는 ‘아브람’의 미래적인 운명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라’라는 새 이름 아브라함뿐입니까? 사라도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너의 아내 사라이를 더 이상 사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사라가 그의 이름이다.”(창세 17,15) ‘사라’라는 이름도 ‘사라이’의 다른 형태인데, 둘 다 ‘왕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라도 아브라함처럼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은 아내 사라도 남편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구원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심으로써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 자체에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시며 당신의 교회를 맡기셨고, 사울은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음을 분명히 드러내었지요. 우리도 세례명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고, 그밖에도 ‘그리스도인’, ‘천주교신자’라고 불리며, 나아가 레지오 단원으로서 ‘성모 마리아의 군사’라는 거창한 이름도 받았습니다. 이 이름들은 나의 운명을 바꾸게 될 이름들입니다. 나의 세례명에 맞게,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단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주님 창세기 18장에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면서, 세 사람의 손님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천막을 찾아오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느님이신데 왜 셋으로 나타나신 걸까요? 이 점에 관해서는 ‘주님 한분과 주님을 동반하는 천사 둘, 합해서 셋’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왜냐하면 18장 22절에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라는 말씀, 19장 1절에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는데, 그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다.”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적 존재의 인간 방문에 관한 설화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그 신원이 불확실한 호메로스가 기원전 8세기 경 지었다고 추정되는)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오디세이아에는 “신들이 유랑하는 나그네 차림으로 온갖 모양을 하고서 여러 지방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가사적(可死的) 인간들의 악행과 선행을 구경한다.”(XVII, 485-87)는 표현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이 대목을 삼위일체와 관련지어 ‘나그네 셋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해석은 오늘날 설득력을 잃고 있습니다. 셋이라는 숫자 자체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편 손님을 환대하는 일은 고대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에 해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 앞에 나타난 손님들이 하늘에서 온 손님인지 알 턱이 없었지요.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또 정성을 다해 나그네를 대접한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 하실 말씀을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주님께서는 나그네의 모습으로도 오실 것이지만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도록 오신다는 말이지요. 2013년 12월17일 아침식사에 성 베드로 성당 인근 등지에서 집 없이 떠도는 노숙인 4명을 초청해서 자신의 77세 생일을 축하하신 분, 2014년 생일에는 노숙인 400명에게 침낭을 선물하신 분, 2015년 2월부터 노숙인들에게 샤워 시설을 무료로 개방하신 분, 그해 3월26일에는 노숙인 150명을 바티칸박물관 VIP투어에 초대하신 분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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