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사도행전 읽기 (6)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동조하던 젊은이 사울이 재등장하면서 사도행전 이야기는 새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이 인물은 사도 13,9부터 바오로라고 불리며 사도행전 전체 스토리를 이끌고 갈 것입니다. 이에 앞서 9장은 그의 회심 이야기를 다룹니다. 여기서 잠시 회심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의 이름에 관해 살펴봅시다. 사울과 바오로 필리 3,5에서 바오로는 자신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출신 지파 선조 가운데 유명한 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곤 했는데, 바오로도 이런 관습에 따라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은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었습니다(1사무 9,1-2). 이런 관습은 루카 복음 전반 부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즈카리아가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지을 때 사람들이 엘리사벳에게 “당신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라고 질문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루카 1,61). 그런데 당시 바오로처럼 외국에 살던 유다인들은 유다식 이름과 외국식 이름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 예로 여호수아는 야손이라는 외국식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사도 17,5-9), 사도행전에서 자주 언급되는 실라스(15,32; 16,24; 17,14; 18,5)는 외국식으로 실바누스라고 불리곤 했습니다(1테살 1,1; 2테살 1,2; 2코린 1,19).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와 언어가 교차되던 타르수스에서 자란 바오로도 유다식 이름 사울과 외국식 이름 바오로라는 이름들을 함께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루카가 사도 13,9 이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만 사용하다가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파견될 때부터 바오로라는 이름만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마치 회심 이전에는 사울이라 불리다가 회심 이후 선교사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부터 바오로라 불리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학자들은 바오로가 처음부터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봅니다. 유다 사회에서는 사울로 통하였고, 로마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바오로로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글에서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 바오로로 통일해 사용하겠습니다. 바오로의 회심 회심 이야기는 바오로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9,1). 그러다가 바오로는 갑자기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쿠스, 곧 오늘날 시리아 땅에까지 올라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올 수 있는 권한을 청합니다. 사실, 지난 호에서 다룬 것처럼 대사제는 다마스쿠스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올 아무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또한 바리사이였던 바오로가 사이가 좋지 않던 사두가이 수장 대사제에게서 권한을 받아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루카는 이에 개의치 않고 바오로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올라갔다고 전합니다. 만약 루카가 이를 모르고 썼다면 루카는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이야기꾼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루카가 이를 알고 썼다면 여기서 바오로의 어리석은 무모함은 더욱 부각됩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바오로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기 직전 회심하는 이야기를 생생히 전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신자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갑자기 하늘에서 번쩍이는 빛을 보고 땅에 엎어집니다. 그리고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9,4)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후 바오로는 사흘 동안 눈이 멀어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예수님의 지시대로 하나니아스의 안수를 받은 뒤 기적적으로 눈을 뜨게 됩니다. 바오로는 자발적이 아니라, 예수님께 완전히 사로잡혀 세례를 받은 뒤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게 되는데, 그렇게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리도록 선택한 그릇이 됩니다(9,15). 이제 바오로는 지금까지 행하던 어르석은 박해자의 모습에서, 박해를 당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는 이로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행했던 박해자로서의 악행을 기워갚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바오로의 회심 시기를 대략 33년경으로 봅니다. 사도 9장은 이 시기에 일어난 회심 사건을 매우 상세히 그려준 뒤 22장과 26장에 가서 이 사건을 두 번 더 언급합니다. 아마도 루카에게 바오로의 회심이란 사건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들에서 회심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박해자였던 자신의 마음에 예수님을 계시해 주셨다고 이야기할 뿐입니다(갈라 1,16). 박해자였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기 때문일까요? 바오로는 자신의 신비체험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참 겸손한 모습인 듯합니다. 바오로의 복음 선포(사도 9,20-31)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의 제자들과 함께 며칠을 지낸 뒤 곧바로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박해자였던 그가 예수님을 전하는 것에 놀라워하였고, 다마스커스에 사는 유다인들은 매우 당혹해 합니다. 그들의 당혹함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래서 “꽤 시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바오로를 없애 버리기로 공모하였는데, 이를 눈치챈 바오로의 제자들이 밤에 바오로를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탈출시킵니다. 이미 다마스쿠스에서 바오로에게 제자들까지 생긴 것을 보면 바오로의 활동이 나름 큰 성과를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이후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루카의 증언에 따르면 제자들은 바오로를 두려워하여 그와 어울리려 하지 않습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르나바입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를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그가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결국 사도들은 바르나바의 증언에 따라 바오로를 형제로 받아들였고,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게 됩니다. 사실, 박해자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용서와 화해의 인물, 바르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오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이떻게 보면 바오로의 후견인이자 스승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바르나바였던 것 같습니다. 회심한 이후 바오로의 활동은 예루살렘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나 봅니다. 유다인들이 바오로를 없애려 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갔다가 그의 고향 타르수스로 보냅니다. 이렇게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짐으로써 사도 1,8에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바들 가운데 일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신 바 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우리는 복음이 땅끝까지 퍼져나가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다음 호부터는 바로 이 이야기, 곧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는지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2020년 5월 17일 부활 제6주일 가톨릭마산, 염철호 요한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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