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들과 오늘 우리] 다양성과 공존의 지혜 숙녀 지혜 잠언에서 독특한 점 하나는 ‘지혜’의 의인화다. 지혜는 1장 20-33절과 8-9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지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호크마’와 그리스어 ‘소피아’ 모두 여성 명사로 성경에서 지혜를 여성적 존재로 이해한 것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말씀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표현되는 이 숙녀 지혜(Lady Wisdom)는 자신의 언어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안내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씀의 선포자 임무를 수행하는 이(1,20-33), 하느님과 피조물의 중개자(8장)로 소개된다. 트코아 여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누이 타마르를 욕보인, 어머니가 다른 형제 암논을 죽인 뒤 자기 어머니 마아카의 고향인 그수르 왕국으로 달아났다. 세 해가 흘러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자, 다윗의 조카로 장군이었던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하고 이스라엘로 불러들이게 할 묘책을 꾸민다. 요압은 트코아에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불러 그에게 임금 앞에 나아가 할 말을 알려 주었다(2사무 14,2-3 참조). 트코아 여인은 다윗에게 자신을 과부라고 소개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 여종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들판에서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이가 없어, 아들 하나가 다른 아들을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집안이 이 여종에게 맞서 일어나 말합니다. ‘제 동기를 죽인 자를 내놓아라. 그가 살해한 동기의 목숨 값으로 우리가 그를 죽여 상속자마저 없애 버리겠다.’ 이렇게 그들은 남은 불씨마저 꺼 버려, 이 땅 위에서 제 남편에게 이름도 자손도 남겨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14,6-7).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그에게 아들을 보호해 줄 뿐만 아니라 아들의 살인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자 여인은 같은 죄를 지은 압살롬 또한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용서를 받도록 중재에 나선다. 여인의 말을 다 듣고 나서야 다윗은 이 일 뒤에 요압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요압을 불러 아들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말한다(14,8-24 참조). 트코아 여인은 요압이 일러준 대로 임금 앞에 나아가 말하였지만, 사무엘기 저자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대신에 ‘지혜로운 여인’이라 부르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가부장적이며 여자를 낮추어 보던 고대 근동 사회에서 성경이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은 트코아 여인의 지혜가 그만큼 잘 알려져 있었음을 말해 준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경계를 허문 지혜로운 여인에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도 있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을 때, 어떤 여자가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7,24-26 참조),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인 이 여자에게는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이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여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들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모두 부정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평소와 달리 예수님은 여자의 청을 거절하신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 예수님의 대답에 그는 실망스럽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부정한 짐승인 개를 이민족에 견준 것은 공격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거절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시 유다교 사고에서 볼 때 이는 구원의 기회가 먼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고 이민족은 그다음이라는 생각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보편적 구원이 이민족에게도 열려 있지만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차갑고 모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예수님의 거절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7,28). 여인은 구원에서 이스라엘의 잠정적 특권을 인정한다. 하지만 자녀의 우선적 권리와 강아지의 부차적 권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아지들도 떨어진 부스러기는 먹는다고 주장한다. 그의 뛰어난 통찰력이 엿보인다. 예수님의 거절만큼이나 여자의 반응 또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의 논리적이며 지혜로운 응답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기분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여자와의 논쟁에서 화를 내거나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말에 동의하신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논쟁에서 여자의 승리(?)는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에 자리한 문제를 극복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앞날은 유다교의 배타주의가 아니라 빵의 공유라는 토대 위에 전개되었다. 유다교와 이방인, 끝 정결과 부정 사이의 사회 종교적 장벽을 없애도록 촉발한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지혜로운 응답과 예수님의 포용적인 사고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와 타자 사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조직이다. 프랑스의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 정신 밑바닥에는 ‘우리’와 ‘타자’의 이분법적 구분이 새겨 있다. 그리고 이것은 복잡하고 무질서한 세상을 두 개의 대립하는 개념으로 범주화하여 분류함으로써 질서를 부여하는 구조다. 여기에 더하여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매리 더글라스는 질서의 근본에 ‘순수’와 ‘위험’으로 대비되는 상징체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무질서한 현상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순수라는 상징체계를 구성하고, 그 외부의 존재를 오염된 것으로 간주하며 잠재적으로 순수를 파괴할 수 있는 위협으로 파악하였다. 다양한 사회 구성원 사이의 공존이라는 문제와 관련 있는 스트로스와 더글라스의 이분법적 구분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 집단에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장치 구실을 하는 본질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와 타자라는 구분은 절대적 개념일까? 어떤 사회집단을 준거로 삼느냐에 따라 개인은 주류에 속한 존재이거나, 배제된 존재가 된다. 누가 주류이고 누가 비주류인가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규정하는 집단 자체의 문제일 수 있다. 다양성과 공존의 지혜 오늘의 한국에서 부정적인 키워드의 전형은 분열과 대립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나라에 세대, 이념, 성별 갈등이 또다시 서로를 나누고 맞서게 한다. 다름이 존중되기보다는 차별과 대립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소모적이며 파괴적인 대립은 건강한 사회를 붕괴시킨다. 순수와 위험으로 나뉜 우리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하다.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고인 물과 같이 부패할 수 있고 스스로 발전할 기회를 제한하는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다양성이 만들어 내는 역동성이 우리의 잠재적인 성장 동력이 아닐까 싶다. * 강선남 헬레나 -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석사,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신약학 전공)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강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성경의 인물들」, 「교부들의 성경 주해, 탈출기-신명기」 등의 역서를 냈다. [경향잡지, 2020년 6월호, 강선남 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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