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사도행전 읽기 (8) 스테파노의 일로 박해가 일어나며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박해를 계기로 교회는 예루살렘을 떠나 모든 민족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일은 우리네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안티오키아 교회의 설립과 그리스도인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 후 소아시아 지역의 통치자가 된 셀레우코스 임금은 자신이 물려받은 새 왕국을 잘 통치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에 수도를 짓고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오키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안티오키아는 시리아라고도 불리는,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 땅을 아우르는 지역의 수도가 됩니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50만 명의 인구가 살아가는, 로마 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디아스포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모여 살았는데, 이곳 안티오키아에도 많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으며 회당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11,19는 스테파노 순교로 흩어진 제자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안티오키아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루카는 처음 제자들이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다고 강조합니다. 초대 교회의 이러한 분위기는 사도 바오로의 로마 1,16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오로는 복음이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라고 선포합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바오로의 말처럼 복음 선포자들이 먼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복음을 전해 들었던 그리스계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당시 유다교 회당에는 유다인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랜 디아스포라를 거치면서 회당 주변에 살던 이방인들도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을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이들’(God-fearer), 혹은 ‘개종자’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선 많은 이방인들은 이미 유다교에 익숙했던 개종자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를 섬기는 이들이 늘어나자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기존의 유다인과 따로 구분해서 부를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처음 생겨납니다. 그런데 이 호칭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만들어 붙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 붙여준 이름입니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이름이 사용된 바 있습니다. 바로 ‘천주학쟁이’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르나바를 파견하여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 신자들을 격려하다가 일손이 모자라자 타르수스로 가서 바오로를 데려옵니다. 그렇게 하여 둘은 함께 일하며 일 년 가량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칩니다(사도 11,26). 이 일년여의 기간 동안 바오로는 바르나바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본다면 바르나바가 없었다면 바오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박해자 바오로의 진면모를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곁에 둔 바르나바의 용기가 없었다면 역사는 바오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활동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은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 선교여행의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이곳 교회를 설립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교회 전승은 안티오키아를 베드로의 첫째 딸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가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말입니다. 후에 안티오키아의 주교가 되었던 이냐시오 성인은 베드로의 제자였습니다. 매우 뛰어난 명성을 지녔던 성인은 황제의 명에 의해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합니다. 성인께서는 압송되는 길 가운데 일곱 통의 편지를 남기는데, 이 편지들은 오늘날까지 남아있습니다. 학자들은 마태오 복음서도 이곳 안티오키아에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저술되었다고 보는데, 안티오키아는 이처럼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한 교회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유다 지방 신자들을 위한 구호 헌금(사도 12,27-30) 예루살렘에서 예언자들이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는데, 그들 가운데 하나인 하가보스가 기근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그는 사도 21,10-11에 다시 등장해서 사도 바오로에게 예루살렘에서 체포될 수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예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가보스가 예언한 것처럼 클라디우스 황제 때, 곧 47~48년 사이에 로마 제국 곳곳에서 실제 기근이 일어났다는 역사적 보고가 있습니다. 더욱이 48년에는 안식년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티나 지방의 기근은 더 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식년에는 경작지도 쉬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자 안티오키아 신도들은 각자 힘닿는 대로 헌금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의 손을 거쳐 예루살렘 교회 원로들에게 보냅니다. 선교의 중심지가 될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이처럼 언제나 예루살렘 교회와 연대성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연대하는 분위기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글들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주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한 모금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안티오키아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 공동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관심사였습니다(로마 15,25-27; 1코린 16,1-4 등).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바르나바와 사울이 구호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즈음, 헤로데 임금이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투옥됩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히려 헤로데의 죽음 이야기로 마무리될 것입니다(12,20-23).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치 예수님 탄생 때 등장한 헤로데가 이제야 죽음을 맞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세 명의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많은 아이들을 죽음에 빠트렸던 임금 헤로대를 우리는 헤로대 대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유다인이 아닌 이두메아 사람으로 로마에 큰 기여를 한 다음 유다 땅의 임금이 된 아버지 안티파텔에 이어 유다 임금이 된 인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헤로데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하실 때 등장하는 헤로대로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던 헤로데 안티파스였습니다. 그는 갈릴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 영주로 공식적인 임금 칭호를 지니지는 못했던 인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아그리파 1세’로 헤로데 대왕의 손자입니다. 아그리파 역시 로마 황제를 돕게 되어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서 임금이라는 칭호를 얻게 됩니다. 이 모든 헤로대들의 공통점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헤로대 가문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구약의 파라오처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곧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를 박해하는 임금들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깁니다. [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4-5면, 염철호 요한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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