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신앙은 폭력을 낳는가(Erzeugt der Glaube Gewalt?) 우리가 또다시 거의 잊고 사는 일이 있습니다. 9·11테러가 바로 그것입니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두 대의 비행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에 돌진합니다. 이 테러로 이날 거의 30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은 종교에서 나온다고 비난합니다. 물론 그러한 비난은 예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크진 않았지요. 종교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의 생각을 완강히 고수하고 고집하기 때문에 유연성이나 관용이 없고 독선적이며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폭력에 대한 이런 태도가 아주 쉽게 격렬한 공격성으로 나타난다고 비난합니다. 따라서 종교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이 가장 위험한데, 특히 이들 종교가 완고한 교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소설가 딕 프랜시스(Dick Francis)는 그의 대표적 추리소설 가운데 하나인 『스트레이트(Straight)』에서 무심코 지나가듯, 그러나 그 때문에 더욱 효과적으로 들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상 암으로 죽은 이들보다 종교 때문에 죽은 이들이 더 많다.” 저는 불명예스러운 이 말을 힘주어 반박합니다. 이 말은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훨씬 더 개연성이 있는 추론은, 종교로부터 위로와 행복을 얻을 수 없었다면, 인류는 우울증으로 이미 멸망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 추론을 자세히 다루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배제와 혐오, 억압과 폭력, 심지어 수많은 살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배제와 폭력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문헌들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은 힘주어 부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배제와 혐오와 비방과 억압과 살인을 저지를 때, 그것은 신약성경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원천과 교리들을 거스르는 짓이었습니다.
산상설교 신약성경만을 놓고 볼 때도, 모든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산상설교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무기를 손에서 내려놓고 비폭력의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는 엄중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 5,39-40)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이 말씀들은 교회 역사 안에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은 세계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순교자와성인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 때문에 이 말씀들을 세상에서 치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반론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늘 다시 듣게 되는 반론이 있습니다. 물론 산상설교의 말씀이 아주 명확한 것은 맞지만, 신약성경도 구약성경과 하나를 이루는 경전이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폭력의 하느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반론입니다. 증오와 말살을 요구하며 질투하고 무관용적이며 극단적이고 무자비하신 하느님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교의 거룩한 경전 역시 이슬람의 코란과 다를 바 없이 대단히 모순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반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외부로부터 자주 들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머릿속에도 은밀하고 조용하게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에 대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런 반론들은 실제 성경을 모르고 하는 말들입니다. 그 반론들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포기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요구를 담은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딸린 우연적이고도 임의적인 부록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약은 구약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입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최종 편집본’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신약성경이 폭력과 무관용을 배척하기 때문에, 폭력에 관한 구약성경의 모든 텍스트는 새로운 맥락에 놓입니다. 곧 폭력에 관한 구약성경의 모든 텍스트는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읽고 비평해야 하며, 나아가 신약성경을 토대로 더 깊이 파악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목소리, 곧 예수님의 목소리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은 아직 여러 종교들에서 한 분이신 참하느님으로 넘어가는 여정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에서 이스라엘의 신학자들과 예언자들은 바로 혁명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백성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집단적인 저항과 수많은 배반을 치르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구약에 여러 목소리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 목소리들은 언뜻 보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폭력이라는 주제에서 특히 그러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실제로 여러 텍스트에서 폭력을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조장하고 미화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을 비판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곧 구약성경 자체에 이미, 신약성경과는 독립적으로, 폭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고, 이는 갈수록 점점 더 강력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특히 유배 이후 텍스트에서 잘 드러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과거 역사를, 곧 외부로부터의 폭력과 하느님 백성 자체 안에서의 폭력이 자신들을 뒤덮었던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폭력에 대한 구약성경의 비판 이를테면 창세기 1-11장이 그렇습니다. 이 장들은 원역사로서 모세오경, 곧 토라의 시작을 이루는데,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바라보시며 세상이 당신이 본래 원하시던 대로 유지되지 않았음을 직시하십니다.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찼음을 창세기는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느님께서 내려다보시니, 세상은 타락해 있었다.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세상에서 타락한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창세 6,11-13) 이 텍스트와 여기에 이어지는 대홍수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폭력에 동의하지 않으심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세상을 바라십니다. 권력 남용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원하십니다. 정의와 평화 가운데 사는 사회가 그분이 바라시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세상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를 두고 구약성경은 놀라운 답변을 내놓습니다. 곧 그 평화는 세상에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더 강력한 한 백성이 존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수없이 발생하는 폭력마다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며, 그렇게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을 하는 한 백성을 통해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세계 경찰은 장점이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그것은 필수불가결한 면도 있습니다. 한 국가에 경찰과 법제도가 필요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결정적인 예언서 텍스트들에서 폭력을 폭력으로 끝낼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텍스트들에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체험과 희망들이 집약되어 담겨 있습니다.
칼을 보습으로 이제 이와 관련해 예를 들면 이사야서 2장 2-4절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의 평화는 다른 민족들보다 더 잘 무장한, 더욱 강력한 한 백성을 통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을 통해, 곧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 사는 하느님 백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산 위에 우뚝 선 도성이 되어 모든 민족이 그 도성을 바라보며,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 그리로 순례를 올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환시이자 미래상입니다. 이사야서 2장에 따르면, 세상에 그런 평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은 이미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사회가 온 세상에도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텍스트는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2-5) 이 텍스트는 세상의 평화는 오롯이 비폭력을 통해, 모든 무기를 폐기함으로써 도달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평화로운 이 새 질서는 민족들의 깨달음을 통해, 현대적으로 달리 말하면 세상의 계몽된 이성과 대화와 회의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르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 텍스트 자체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선포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이 먼저 이 새로운 사회 질서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백성 한가운데에 하느님의 가르침과 비폭력이 먼저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될 때만 비로소 평화는 다른 민족들에게서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사야서 2장 이 환시의 텍스트는 끝에 이렇게 촉구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 2,5) 이제 스스로 판단해봅시다. 이사야서 2장의 하느님은 폭력의 하느님, 화를 내시고 전멸시키시는 공격적인 하느님이신가요?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구약성경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구약은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통해, 폭력을 포기하는 이는 자주 그 자신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폭력에 기대는 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제2 이사야서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억압받고 짓밟힌 이스라엘의 체험에서 나온 ‘주님의 종의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구약은 ‘주님의 종’이라는 비밀스러운 상징 아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끌려간 이스라엘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종 이 ‘주님의 종’을 향해, 이 보잘것없는 이스라엘을 향해, 민족들이 뭉쳐 일어나 함께 이 주님의 종을 칩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종은 하느님께 충실합니다. 하느님께만 자신의 피난처를 둡니다. 주님의 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그는 피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종은 민족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53장에서는 갑자기, 주님의 종을 향해 날뛰던 권력자들의 고백이 나옵니다. 민족들과 그 임금들은 이 망가진 주님의 종이 누구인지, 하느님께서 그에게 어떤 뜻을 품으셨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들은 이제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이사야서의 이 신학은 하나의 정점이며, 이 정점은 뛰어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신학은 사상적으로도 모든 것을 뒤엎는 하나의 혁명과도 같습니다. 이미 구약성경 자체에서 그렇습니다. 이는 폭력적인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통찰입니다. 세상의 참평화는 희생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인식입니다. 참평화는 결코 승리자들에 의해 세워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오늘날까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곧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주님의 종이 그저 짓밟힌 이스라엘을 집단적으로 통칭하는 표현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의 운명을 투영하는 한 개인을 의미하는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이유들로, 이사야서의 이 주님의 종이 바빌론 유배를 겪으며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열린 채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한 평화의 임금 달리 말해, 지금까지 숨가쁘게 달려오며 살펴본 텍스트에서 ‘주님의 종’이라는 이 형상이 분명 한 개인을 의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낼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서에는 폭력이라는 주제와 관련해 구약성경에서 가장 후대의, 그러나 가장 중요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가 전해지는데, 여기서는 메시아가, 곧 한 개인으로서의 인물이 이스라엘과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어쩌면 이 텍스트에도 이스라엘의 깊은 체험이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폭력적인 승리자가 되기보다는 희생자가 되는 것이 더 낫다는 체험 말입니다. 여기서 희생자가 겪는 그 오롯한 희생은 백성 전체가 결코 견뎌낼 수 없는 희생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말로 하자면, 하느님 백성은 다만 어느 한 개인이 먼저 절대적인 비폭력의 길을 앞서 걸어갈 때만 그 희생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서 9장 9-10절이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온 예루살렘이 환호하는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타는 동물인 나귀에 올라서는 전쟁을 이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메시아 임금은 폭력을 포기한 이고, 그렇게 평화를 가져오는 평화의 임금이십니다. 그는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부수시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실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적의 무기들이 파괴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 백성 자체의 무장이 해제된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후대의 텍스트인 즈카르야서 9장은 이미 이사야서 2장이 말한 바를 다시금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2장의 내용을 오시는 메시아와 관련시켜 해석합니다. 이미 말했듯 즈카르야서 9장은 후대의 텍스트입니다. 이 텍스트가 편집될 때는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전쟁 기술을 이용해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였습니다. 그의 나라는 이집트에서 인도까지 이르렀지요.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는 군마를 타고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과는 반대되는 형상인데, 이를 의도적으로 내세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유다의 메시아 임금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달리 말해, 그의 유일한 무기는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힘은 알렉산더 대왕의 힘보다 더 크고 셉니다. 이처럼 즈카르야서에서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이 집약되어 나타납니다. 이 전통을 간단히 표현하자면, 하느님께서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치유 수단은, 비폭력을 사는 한 백성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 백성이 희생자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또다시, 백성 전체가 그 희생을 감당할 수 없기에 절대적으로 비폭력의 길을 앞서 걷는 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백성 안에서 되도록 많은 이들이 그 발자취를 따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 - 평화의 화신 이처럼 구약성경은 넓고 깊게 생각합니다. 신약성경은 그 이상 더 말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그 한 사람’이 정말로 오셨다는 사실을 첨가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이 이미 통찰하고 예견했던 바를 모두 사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분의 백성이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보다는 기꺼이 희생자가 되는 것, 그분이 그런 백성을 얻는 것뿐입니다. 때문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서 분명하게 말하는 ‘안식’은 일차적으로 내면에서의 영혼의 달콤한 안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땅’ 위에서의 안식, 적으로부터의 안식, 저녁이면 누구나 자기 집 앞에 나와 자신의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쉴 수 있는 안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역시 그분의 수많은 다른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우선적으로 사회적인 의미를 띱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는 비폭력에서 오는 평화이고, 하느님 백성의 평화이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온 세상을 위해 고대하던 평화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감수성과 전례 없는 확신성을 지니시고 구약성경에 있는 최고의 텍스트들을 당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그분은 온전히 구약성경에 따라 사시고, 구약성경을 완성하십니다. 이제 구약성경이야말로 폭력적인 하느님,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하느님을 선포한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코란과 달리 그리고 그 코란이 말하는 하느님과 달리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신약성경에서 비로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경 자체에서 폭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집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 인간 사유의 엄청난 혁명이 완성됩니다. 곧 폭력적인 가해자가 되기보다는 희생자가 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시작된 이 평화의 전통에 대해 우리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전통은 구약성경에서 계속 빛을 발하고 있고, 예수님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세례를 통해 이미 이 전통 안으로 받아들여진 사람들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신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 Gemeinde에 머물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외 다수가 있다. 로핑크 신부님은 책 집필 외에 유일하게 『생활성서』 독자들에게 매월 글을 보내며 한국 신자들과의 소통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월간 생활성서, 2020년 7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저, 김혁태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