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사목교서 ‘성서의 해Ⅱ’ 특집] 요한 복음서 (1) ‘셋’과는 다른 ‘넷째’ 복음서 우리는 이제 네 복음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 복음서를 만나게 됩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요한 복음서 저자를 ‘독수리’에 비유하곤 하는데, 심오한 진리를 꿰뚫어 보는 저자의 영적인 눈이 마치 높은 곳에 올라 먼 곳까지 응시할 수 있는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을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앞의 세 복음서를 넘어서는 심오한 그리스도론적 안목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일찍이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는 이 복음서를 ‘영적인 복음서’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저자의 원숙한 신학적 성찰은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인 이른바 “로고스(λόγος, 말씀) 찬가”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마르코에서는 그분의 세례부터, 마태오-루카에서는 그분의 탄생부터 시작한다면, 요한 복음은 그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세상이 창조되는 순간, 아니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의 시기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분,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이신 분, 즉 “말씀(λόγος)”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1,14) 우리에게 다가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처럼 요한 복음 저자는 앞서 살펴본 공관 복음서와는 결이 다른 신학적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요한 복음은 내용에서도 공관 복음서와 차이를 보입니다. 마태오-마르코-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1년 남짓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서술하고, 또 대부분의 활동이 갈릴래아와 그 주변에서 전개되다가 단 한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그곳에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맞이하시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반면에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중 세 번의 파스카 축제가 있었음을 암시하는데(2,13; 6,4; 11,55), 이를 근거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이 1년이 아니라 3년 남짓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단 한 차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수차례(2,13; 5,1; 7,10; 12,12) 올라가셨는데, 그렇게 올라가셨을 때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이 요한 복음서 곳곳에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차이는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나타납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께서 처형된 날을 금요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 복음에서는 이 금요일이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일인 반면, 요한 복음에서는 파스카 축일이 안식일, 즉 토요일과 겹치는 것으로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최후의 만찬이 공관 복음에서는 파스카 축일 만찬이 되지만, 요한 복음에서는 단순한 고별 만찬이 됩니다. 이러한 차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는 요한 복음 저자가 공관 복음 저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전승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어느 전승이 역사적 사실에 더 부합하는 것일까요?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요한 복음이 저자의 신학적 숙고가 많이 반영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공관 복음보다 덜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실 공관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이미 여러 번 방문하신 것을 암시하는 대목들(마르 11,2-7; 14,12-16)이 보이는데, 이는 요한 복음서가 제시하는 공생활 기간(3년)이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까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기원후 30년”은 실제로 요한 복음이 제시하는 파스카 축일과 안식일이 정확히 겹치는(요한 19,31) 해였는데, 이 해를 예수님의 사망 연대로 추정하는 것은 여러 정황상 꽤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네 복음서 중 어느 복음이 예수님의 실제 역사에 더 가까운 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이를 명확히 규명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요한 20,31)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복음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고취시키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있는지, 다음 시간에 이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인천주보 3면, 정천 사도 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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