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뭐라꼬예?] 죄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 죄인들을 멸망에서 구원하는 의인의 역할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창세 13,10-13) 창세기의 표현에 의하면, 소돔 사람들은 원래부터 악인들이고 주님께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길손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식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받은 후에 길손들을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배웅할 때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함께 걸어갔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창세 18,17) 하시면서 ‘아브라함은 크고 강한 민족이 될 것이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죄인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거우니 그 도시들을 징벌할 것’ 이라는 말씀이었지요. 이에 아브라함은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하면서 하느님과 협상(?)을 벌여 죄인을 살릴 의인의 수를 50명, 45명, 30명, 20명을 거쳐 10명까지로 줄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 열 명(의 의인)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기도를 하자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벌하고자 하시던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의인들은 삶과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에서 악인들을 구해내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성모 마리아께 기도하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소돔 사람들의 악한 행실과 롯 가족의 구원 창세기 19장은 길손으로 나타난 두 천사를 접대하는 롯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 길손들에 대한 소돔 주민들의 악한 행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떠난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성문에 앉아있던 롯이 그들을 보고 자신의 집에 들어 밤을 지내고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광장에서 밤을 지내려했던 그들은 롯이 하도 간절히 청하자 결국 롯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이 일을 어쩐답니까?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소돔의 사내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싸고 이렇게 끔찍한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 당신 집에 온 사람들 어디 있소? 우리한테로 데리고 나오시오. 우리가 그자들과 재미 좀 봐야겠소.”(5절) 재미를 보자고 하다니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소돔의 주민들이 했다는 ‘재미 좀 보자’는 말은 원래 히브리말로 ‘알아보자’는 뜻의 성적인 의미를 지닌 말로서 롯의 손님에게 ‘동성애적인 폭행’을 시도하려 했다는 것입니다.(창세기의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단어가 ‘남색’ 혹은 ‘소돔사람’을 뜻하는 ‘sodomite’ 입니다.) 이에 롯은 기막힌 제안을 하였습니다.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딸 둘을 그들에게 내어 줄 터이니 손님들에게는 아무 짓도 말아 달라고 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롯을 밀치고 문을 부수려고 하였고, 그러자 집안에 있던 손님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끌어들인 다음 문을 닫고서는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그 집 문 앞에 있던 사내들을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눈이 멀게 하여 문을 찾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손님들은 롯에게 “이제 소돔을 파멸시킬 것이니, 장래의 사위들, 아들과 딸들, 가족 모두를 소돔에서 데리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롯으로부터 들은 사위들은 웃음을 쳤고, 롯 자신도 떠나길 망설였습니다. 이에 천사는 ‘목숨을 구하려면 뒤를 돌아다보지 말고,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쉼이 없이 산으로 달아나라’ 하였습니다. 그랬지만 롯은 ‘멀리 산으로 달아나기엔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우니 가까운 성읍으로 달아나게 해달라’ 하며 매달려 마침내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아내만을 잃고)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롯, 구원받지 못한 롯의 아내 롯은 허약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롯은 불의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두 딸까지 내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또한 롯은 그토록 터무니없는 제안을 내놓고도 손님들을 보호하는데 실패했고, 심각하고 즉각적인 하느님의 심판을 피할 피신의 결정 앞에서 자신의 사위될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롯은 스스로도 과감히 소돔을 떠나지 못하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롯은 아브라함의 호의를 입어 자신이 선점한 요르단의 들판에 대해 미련을 가졌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결국 구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 … ‘나리,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 재앙에 휩싸여 죽을까 두려워, 저 산으로는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성읍은 가까워 달아날 만하고 자그마한 곳입니다. … 그러면 제 목숨을 살릴 수 있겠습니다.’”(창세 19,17-20) 허약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롯이었지만, 그는 엄중한 천사들의 경고에 직면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할 방법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즉 롯은 천사들에게 ‘먼 산이 아니라 가까운 성읍으로 달아나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하여 그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결국 롯을 구한 것은, 그가 자신이 살아온 터전인 들판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에 롯의 아내는 지난 삶의 터전에 대한 미련 때문에 자신을 구할 수가 없었던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의 지난 삶의 터전에 대한 미련을 버렸던 롯은 목숨을 구했지만, 그렇지 못하였던 롯의 아내는 그만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다’ 생명 없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과 그 아내의 이야기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거침없이 또 끝까지 달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의 길을 제대로 가지 않을 뿐 아니라 지나온 길에 대해 미련을 보이는 이는 얼마든지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가운데 끝까지 구원의 길에 충실한 우리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버지에게서 자손을 얻은 롯의 딸들 “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그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창세 19, 29) 이렇게 하여 목숨을 건진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굴에서 살았는데, 이들이 기막힌 일을 벌였다고 창세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풍속대로 우리에게 올 남자가 없구나. 자, 아버지에게 술을 드시게 하고 나서,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누워 그분에게서 자손을 얻자.”(19,31-32) 그리하여 딸들은 이틀에 걸쳐 아버지와 잠자리를 가져 자손을 얻었는데, 그들에게서 ‘모압족’과 ‘암몬족’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모압족은 현재의 이스라엘 사해 동쪽에 살면서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민족으로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하느님의 적으로 지목된 종족입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지요. 암몬족은 기원전 13세기 모압 북부 지역에 왕국을 세울 만큼 강성하였으나 다윗에게 패전, 수도까지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모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산발적으로 전쟁을 벌였다가 기원전 2세기에 유다의 마카베우스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는 왜 이 불경스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 때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막강했던 적들이지만 사실상 이렇게 치욕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격하하고 앙갚음하고자 했거나, 롯의 딸들이 자녀들의 기원을 부끄러이 생각하기는커녕 그야말로 순수한 핏줄을 타고 태어났음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자 한 것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창세기 당시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다음의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 결국 아브라함을 보아서 살려준 이방민족들의 조상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과 비교할 때 그 출생부터, 곧 그 기원부터 다르다!’ 즉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던 ‘하느님의 특별한 호의와 기적적인 임신’을 통해서 태어났지만, ‘이방인들의 조상’은 근친상간이라는 순전히 ‘인간적인 술수와 죄스런 임신’을 통해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의 일원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맺어진 백성이고 그분께 대한 신앙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새로운 이름을 지닌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그 기원부터 다르다는 이 은혜롭고 고마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8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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