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 다시 읽기] 마지막 날인 것처럼 – 콜로사이서 가끔씩 종말에 대해 생각합니다. 세상 끝날에 펼쳐질 무시무시한 장면이나 살아온 삶의 행적들을 결산하는 위엄있는 심판관의 형벌 정도를 떠올리는 건 아닙니다. 종말은 지금의 시간이 내게 전부인가, 하는 질문과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어제에 대한 후회나 내일에 대한 계획이 전혀 필요없는 지금만이 전부인 시간, 이것이 제겐 종말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사유의 얼개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감옥에 갇힌 듯 자신의 처지를 묘사하는 대목을 만날 때 저는 종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사도 바오로의 편지 중 옥중 편지는 네 개입니다.(필리 1,7.12-14; 콜로 4,3.10.18; 에페 3,1;4,1;6,20; 필레 1,13) 옥중 편지들의 특징은 사도의 처지와 예수님의 삶을 포개어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사도가 당하는 박해와 고난 속에서 다시 재조명해보는 것이지요. 요컨대 우리가 겪는 환난과 절망은 무의미한 패배나 무기력한 굴종의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따르는 영예로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옥중 생활을 그려볼 때 제가 생각하는 종말은 지금의 삶을 영예로운 십자가의 삶으로, 그 삶이 지금 제겐 전부라는 사실로 이해하고 되새겨봅니다. 이제 우리는 콜로사이서를 통해 예수님을 통한 영예로운 길을 찬찬히 살펴볼까 합니다. 대개의 학자들은 콜로사이서가 사도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사용되는 34개의 단어가 콜로사이서에 등장하고 사도 바오로의 친서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28개의 단어가 사용되는 반면, 사도가 즐겨 사용한 단어들은 콜로사이서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사도의 신학과 결을 달리하는 콜로사이서만의 신학이 나타납니다. 예컨대 이런 것들입니다. 콜로 1,24-25에 특정 교회에 대한 언급없이 보편적인 교회의 사도로 바오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친서는 특정 교회, 구체적 공동체의 문제와 연결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담아내고 있으나 콜로사이서는 교회를 보편적 의미에서, 그러니까 모든 교회를 아우를 수 있는 차원에서 사도의 가르침과 사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지요. 더불어 예수님 역시 우주론적 차원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창조의 주인공으로 묘사되고(콜로 1,15-16), 천상의 권능을 지니신 분이자 교회의 머리로 서술되고 있습니다.(콜로 1,18-19) 이러한 콜로사이서만의 특징의 백미는 ‘이미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콜로 2,12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내는 것이고, 그 삶이란 게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과 결이 다른 무언가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했지요. 살아계신 예수님을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 안에서 신앙인의 구체적 행위로 번듯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콜로사이에서는 종교 혼합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규제하고 안식일의 법을 따져 묻는 유다이즘의 문화는 물론이거니와(콜로 2,16) 당시의 이방인 종교의 영향, 특별히 세상의 구성요소를 따지고 그 근원을 문제 삼는 그리스 철학(콜로 2,8), 천사 숭배(콜로 2,18)를 통한 천상의 신화화된 가르침 등이 뒤섞여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협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의 근원과 중심은 저 천상의 신비한 세계를 쫓거나, 남이 모르는 초월적 지식의 축적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참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우주의 중심이자 근원이시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자 전부로 인식된다는 건, 그리스도에 종속된 삶을 산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데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깨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대개 종속된 삶은 이것 말고 저것이어야 한다는 상당히 편협된 사고에서 시작되곤 합니다. 더러운 것 말고 깨끗한 것, 불편한 것 말고 편안한 것, 나쁜 것 말고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늘 갈라놓고 판단하며 다른 것과 틀렸다 싶은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 삶을 꾸리는 것이 종속적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주의 중심이란 말을 다시 고쳐 표현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껴안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가치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옳고 그름의 식별을 통해 그름을 제거하는 이가 아니라 그름을 옳음으로 이끄는 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세상, 이 우주 모든 것이 함께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와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적 신앙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남들과 다르다는 특권 의식’입니다. 남들과 다른 모범적 삶의 모습이나 절제된 덕목의 실천, 혹은 세련된 삶의 지혜를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의식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교부들이 언급한 우리 교회는 ‘순결한 창녀’였습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되 하느님의 완전함과 거룩함을 지향하는 나그네의 삶이 신앙인의 삶인 것이지요. 세상은 자꾸만 비교하고 좀 더 나은 것에 목말라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는 교회는 지금 처지가 부족하고 모자란다 할지라도 지금이 전부임을, 예수님 당신만을 믿고 살아가는 이 삶이 이미 구원과 부활의 참된 삶임을 고백하는 종말의 삶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애써 노력하는 오늘 하루는 내일을 위한 투자도 아니고 지난 날에 대한 후회를 상쇄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우리의 기쁨을, 구원의 찬미를 온 마음과 온 몸으로 드러낸 시간일 뿐입니다. 내일도 우리는 또다시 부활을 새롭게 살아가겠지요. 어렵지만 예수님만 믿으며 매순간이 마지막이며 전부인 듯 사는 삶, 콜로사이서가 제안하는 참된 신앙인의 삶입니다. [월간빛, 2020년 8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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