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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 묵상] 루카 7,11-17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카테고리 | 성경
작성자유타한인성당 쪽지 캡슐 작성일2013-11-04 조회수971 추천수1

 



2012년 나해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복음: 루카 7,11-17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1661)

 


     < 고통의 유용성 >

          오늘 동기모임을 하면서 김하늘을 이야기 손님으로 하는 힐링캠프TV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였는데 김하늘이 보기와는 다르게 대인관계를 어려워하고 공황장애까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잘 타지 못하고 심지어는 비행기에 타서 이미 출발하는데도 내려달라고 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전에 연속극 촬영을 위해 얼굴에 석고를 바를 때 느꼈던 공포가 죽음의 위협이 되는 모든 상황에 전이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심신이 좀 약해서 그런가보다. 그런데 의지가 있다면 왜 극복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개그맨 이경규씨도 자신도 공황장애가 있다고 하면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김하늘의 고통을 잘 이해하며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때에 따라서 공황장애로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가끔 있지만, 자신도 지금까지 공황장애를 가지고 비행기를 800회 이상 탔다고 하면서 공황장애는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도 주었습니다.

 

저도 몇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다가 잠깐 들어온 선교사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 신부님도 아프리카 비행기를 탔다가 공황장애에 걸려서 돌아가야 할 일정보다 몇 달 더 치료를 하고서야 다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신부가 탔던 비행기는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는 비행기였다는 것입니다. 그 더운 실내에서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물론 대단히 공감되는 것처럼 표정을 짓고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저 스스로는 그 고통을 완전히 공감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같은 병에 걸려본 사람만이 그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이라는 한 고을의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십니다. 누가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그저 그 과부의 처지가 가엾게 보여서 그 과부에게 울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죽은 아들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기적을 청하는 이들도 없었고 그들의 믿음도 전혀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과부의 처지에 왜 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기적을 베푸셨을까요?

바로 당신 어머니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러셨을 것입니다. 당신 어머니도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그렇게 슬퍼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 과부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도 눈물을 흘리시고, 죽은 라자로의 처지를 보고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끌어안아 당신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하면, 죄의 보속인 고통을 모두 겪어야만 인간의 모든 죄가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의 보속인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고통을 겪으셨다는 표징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처지를 당신 처지처럼 느끼실 수 있으셨던 분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저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고 겨울에는 형들이 씻은 물에 또 세수를 해야 했으며 초등학교 때는 양치질도 거의 하지 않았었습니다.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고 거의 한 달을 라면만 먹어야 해서 라면을 너무 먹기 싫어서 울면서 잔 날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나오는 우유를 마셔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제가 여렸을 때 가난하게 자란 것에 대해 원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태어나고 저에게 다시 선택권한이 주어진다면 역시 제가 자라왔던 어린 시절 저의 가정을 선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제가 겪었던 고통이 너무나도 작아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너무 공감을 못해준다는 아쉬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것은 가난을 조금이라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감정처럼 동감할 줄 안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하루에도 3백 명 이상을 진료하고 밤에 쓰러져 자다가도 진료를 해 달라고 찾아와도 한 번도 거절하거나 짜증내지 않고 치료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상대의 아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 사랑이 많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구가 됩니다. 젊은 자녀를 잃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자신도 그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도 오늘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깊이 동감하기 때문에 기적을 하시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위 사람들의 아픔에 민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지는 고통들이 크고 작든지 그것들을 깊이 새겨 사랑의 도구로 삼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유익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고통까지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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