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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와 성경 해석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9 조회수7,706 추천수0

아가와 성경 해석1)

 

성서사도직 2015년(제23차) 총회 · 세미나 강의

 

 

대단히 다양한 해석의 역사를 지닌 아가는 우리에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고 성경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관하여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아래에서는 2013년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 발표회에서 발표한 “아가가 말하는 사랑의 해석”(「21세기에 꽃피는 신학: 2013년 프란치스칸 영성 학술 발표회」, 프란치스코 출판사, 2013, pp.54-79)과 월간 「성서와 함께」에 연재한 아가 묵상을 바탕으로 하여, 해석 방법들과 본문 해석의 예들을 첨가하여 아가와 성경 해석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아가에 관하여

 

아가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노래들의 노래”이다.(아가 1,1) 코헬렛에서 “허무들의 허무”가 최고의 허무를 나타내듯이(코헬 1,2; 12,8), 이 제목은 노래들 중의 노래, 곧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뜻한다. 1세기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이 “아름다운 노래”가 성경에 속하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는데, 이때에 라삐 아키바는 이 책은 당연히 거룩한 책이라고 단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가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날에 비하면 온 세상 전체도 아무것도 아니다. 성문서 모두가 거룩하지만 아가(노래들의 노래)는 거룩한 것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성소가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가가 지극히 거룩한 책이라고 말한 것이다.

 

1.1. 저자와 시대(「아름다운 노래, 아가」, pp.21-23 참조)

 

아가는 잠언, 코헬렛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을 저자로 내세운다.(1,1) 실제 저자는 솔로몬이 아니다. 이 책에서 솔로몬이 나오는 부분에서 솔로몬은 1인칭으로 말하지 않을뿐더러(예를 들어 3,6-11) 솔로몬의 결혼 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들어있고, 사용된 언어와 사회적 배경 등을 볼 때에도 솔로몬이 실제 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이 책의 실제 작성연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본문의 일부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페르시아 시대 이후로 보고(기원전 5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기원전 3세기). 본문에 페르시아 시대 이후의 어휘들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사용된 표상과 문학유형 등에서도 이집트 연애시들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솔로몬 시대에 들어온 것이라기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집트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가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되는 매우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아가의 기원을 신화나 경신례, 드라마 등으로 설명하는 이론들은 접어두고라도, 과거에 주류를 이룬 주장은 이 책이 개별적인 노래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라는 설이었다. 현재에도 많은 이들은 이러한 견해를 따르고 있으며, 특별히 아가를 이집트의 연애시들이나 시리아의 혼인예식 등과 비교하면서 아가에 들어있는 노래들이 그런 데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주석 성경」의 아가 입문에서도, “이 책의 구조는 절과 주제 및 이미지와 상황이 되풀이되고, 연결이나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없으며 현대적 의미의 문학적 구성이 결핍되어 있어 규명해 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가가 단일한 저자에 의해 잘 짜인 하나의 작품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주장들도 제기되고 있다.

 

1.2. 구조(「아름다운 노래, 아가」, pp.24-30 참조)

 

입문서에서 아가의 구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가의 구조에 대한 이론들은 아가의 기원과 해석에 대한 이론들에 결부되어 있는데,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가가 서로 독립적인 노래들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볼 경우 아가는 단일한 구조가 없다고 보게 되고, 단일 저자에 의한 것이라고 볼 때에는 그 구조를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아가에서 구조를 발견할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은 이 책이 개별 노래들의 모음집이라고 판단하고,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보는 이들은 단일 저자에 의한 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Barbiero 2004에 따른 구조를 소개한다.

 

1. 두 연인은 분리되어 있고, 남성이 여성을 찾는다      2,8-17       5,2-5

2. 여성이 남성을 찾는다                                     3,1-5        5,6-6,3

3. 두 연인은 서로의 앞에 있다: 경탄과 갈망            4,1-6        6,4-7,11

4. 합일                                                         4,8-5,1      7,12-8,4

 

아가 1,1은 머리글이고, 1,2-2,7은 서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여기서는 주로 등장인물들이 소개된다. 그래서 토막토막 끊어지는 느낌이 많다. 2,8-17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애인을 찾아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인은 그 순간에 즉시 부름에 응답하여 따라나서지는 않은 것 같다.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연인이 떠나버린 다음 3,1-5에서 그녀는 잃어버린 연인을 찾아 길거리로 나선다. 이렇게 둘이 서로를 찾아 나선 다음, 여인은 가마를 타고 솔로몬에게 온다.(3,6-11) 혼인 행렬이다. 드디어 두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다. 4,1-6에서 남자는 자기 애인을 바라보며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4,1)라고 경탄하며 사랑을 향유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한다. “경탄”이다. 그런 다음 4,8-5,1에서는 그 사랑이 정점에 도달한다. 앞서 인용한 5,1에서는 남녀의 결합이 완성되고, 그 사랑을 긍정하는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5,1)라는 말로 아가 제1부가 끝난다.

 

5,2-5에서 제2부가 시작된다. 앞에서와 같이 먼저 남자가 밖에서 여인을 부른다. 이번에도 역시 이 여인은 대답할 때를 놓쳤고 한 발 늦게 연인을 찾아 나선다.(5,6-6,3) 그런 다음 남녀는 서로 만나고, 여기서도 남자가 자기 애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경탄한다.(6,4-7,11) 그 이후는 다시 사랑의 완성이다.(7,12-8,4) 그 나머지는 결문이다.

 

 

2. 아가의 해석사

 

구약성경에서 아가만큼 다양한 해석의 역사를 지닌 책도 드물다. 10세기의 유다교 학자 사디아(Saadia Gaon)는 “형제여, 당신은 아가의 해석에서 매우 큰 차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가는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와도 같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그의 아가 주해를 시작한다. 아가가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러 해석들은 아가를 서로 다른 사랑을 노래한 책으로 본다. 아래에서는 그 해석의 역사와 각각의 해석의 바탕에 깔려있는 성서 이해를 살펴보고 아가가 과연 어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규명한 다음, 그 일차적인 의미를 다른 사랑들에 적용시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려 한다.

 

아가의 해석사는 인간적인 사랑에 대한 평가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다. 유다교에서 1세기에도 아가의 경전성에 대하여 논란이 있던 것은, 이 책이 구약성경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인간적인 사랑을, “감각적이고 관능적인”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랑을 칭송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가 1,2의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주었으면! 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할 때, 성경에 이러한 구절이 들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가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에 속하는 책들 가운데서도 잠언(5장; 7장)이나 집회서(9장)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여자들을 조심하라고 훈계하는 데에 비하여, 아가는 오히려 사랑을 적극 권유한다(“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 아가 5,1). 이러한 내용을 자구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에게는 아가의 경전성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아가는 성경에 포함되어 있기에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역으로 아가의 경전성을 의심치 않는 이들은 아가를 다른 식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아가의 경전성을 주장한 라삐 아키바(Aquiba)는 “아가를 외설적으로 노래하거나 이것을 세속적인 노래로 만드는 사람은 장차 올 세상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2) 그리하여 유다교에서나 그리스도교에서나 전통적으로는 우의적인 해석이 아가 해석의 주류를 이루었다.

 

2.1. 유다교의 우의적 해석

 

유다교의 전형적인 해석은 아가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드라쉬에서, 위에 인용한 아가 1,2는 연인의 입맞춤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토라의 말씀을 간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다듬어진 형태는 타르굼에서 나타난다. 타르굼은 아가에 나타난 남녀 간의 사랑의 여정이, 이집트 탈출에서부터 종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타르굼을 해석하는 이들에 따라 조금씩 서로 다르게 단락을 구분하기는 하지만, 대략 예를들면 아가 1,2-3,6은 이집트 탈출부터 천막 성소의 건립까지를, 아가 3,7-5,1은 솔로몬의 성전 건립과 봉헌을, 아가 5,2-6,1은 유배를, 아가 6,2-7,11은 귀환과 제2성전 건립을, 7,12-8,14는 메시아 시대를 나타낸다는 식이었다.3)

 

이렇게 아가의 신랑을 하느님으로, 신부를 이스라엘로 보는 해석은 구약성경 특히 예언서의 탄탄한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이 해석을 배척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한다.) 호세아를 비롯하여 에제키엘, 예레미야, 제2이사야로 이어지는 전통이 없이 과연 그러한 해석이 가능했을까? 이러한 예언자들의 전통은 타르굼에서와 같은 아가 해석을 뒷받침한다. 아가의 일차적인 의미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사랑을 노래하는 데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 예언자들의 전통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읽는 이스라엘은 본문에 무리를 가하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그 노래를 하느님과 자신의 사랑에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에도 10세기의 사디아, 11세기의 라시(Rashi) 등 유다교의 주요한 아가 주해자들은 이러한 전통적 해석의 노선을 따랐다. 한편에서는 이와 다른 방식으로 아가의 남녀를 각각 능동지성과 수동지성으로 이해하거나(Joseph Ibn Caspi, Isaac Sehula 등), 지혜와 지혜를 찾는 인간으로 이해하는(Isaac Abravanel 등) 예도 있었으나, 그러한 해석이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2.2. 그리스도교의 우의적 해석

 

그리스도교의 우의적인 해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다교에서와 유사하게 아가의 신랑을 하느님이나 그리스도로, 신부를 교회로 보는 집단적-역사적인 해석 외에 신부를 개별 영혼으로 보는 해석이 발달한 것이 큰 특징이다.

 

그리스도교의 첫째 아가 주석이라고 일컬어지는 히폴리토(Hippolytus, 200년경)의 주석에서는 아가가 말씀의 육화를 노래한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아가 2,8에서 산들과 언덕들을 넘어 뛰어오는 연인은,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육화하신 말씀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말씀의 육화는 말씀이 한 개별적인 인간이 되셨다는 것으로 이해되기보다 말씀의 신성이 인성 자체와 결합한 것으로 이해되므로, 그의 아가 이해는 집단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아가는 그리스도교회가 구약의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치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교의 아가 해석에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히폴리토와 거의 동시대인인 오리게네스(Origen)였다. 이후의 영적인 해석들에 미친 영향 때문에 흔히 오리게네스는 아가에 대한 순전히 영적인 해석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헥사플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성경의 문자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 인물이었고, 그는 자구적인 의미에서 아가를 솔로몬이 만든 축혼가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육적인 인간과 영적인 인간을 구별했고, 그들이 각각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의 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보았다. 자구적 의미는 우의적이거나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 단계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영적으로 진보한 인간은 아가를 교회나 개별 영혼과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아가 1,2를 인용하자면, 그는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주었으면!”이라는 기원이 메시아에 대한 교회의 갈망을 표현하고 또한 영혼이 스승들의 가르침을 넘어서서 하느님 말씀으로부터 입맞춤 받기를 갈망함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는 아가의 해석이 이러한 영적인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고 여겼으므로, 육적인 인간이 이 책을 관능적인 노래로 해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아가를 읽지 말 것을 권고한다. 그는 유다교 안에 소년들에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에제키엘서 첫 부분의 병거 발현, 에제키엘서 마지막의 성전 재건에 관한 부분, 그리고 아가를 가르치지 않는 관습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와 마찬가지로 육적인 사람이 아가를 읽을 때에는 마치 성경이 육적인 욕정을 품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영적인 해석은 여러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른 시기의 중요한 작품로는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y of Nyssa)가 쓴 아가 주해가 있는데, 여기서 아가 1,2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기에 이른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께 드리는 말씀으로 이해된다. 이후의 수많은 작품들 가운데 부분적으로나마 우리말 번역본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ard of Clairvaux)의 아가 주해와 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의 「영가」가 있다. 여기에서도 아가 1,2에 대한 해석을 살펴본다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는 이 구절이 “옛 성조들의 구세주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염원과 경건한 기다림의 감정을 풍겨준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안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이 주종을 이루었다.4)

 

2.3. 자구적 해석에 대한 부정적 이해

 

자구적 해석은 처음부터 있었다. 라삐 아키바가 자구적 해석에 강하게 반대했고 탈무드에서도 아가를 통속적인 노래처럼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이는 그만큼 초세기에도 아가를 현세적인 사랑의 노래로 부르는 이들이 없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유다교에서나 그리스도교에서나 우의적 해석이 자리를 잡아가던 시대에 자구적 해석을 주장한 이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heodore of Mopsuestia, 4-5세기)였다.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자로서 아가뿐만 아니라 성경 전반에 대해서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의적 해석을 거부했지만, 특히 아가의 경우 그의 자구적 해석은 눈에 띄는 것이었다.

 

그가 아가의 우의적 해석을 반대한 첫째 이유는 아가에서 하느님이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참고로, 현대의 주석자들에게도, 어떤 해석을 선택하든 아가에 하느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큰 중요성을 갖는다. 이것은 아가가 순전히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말하는 지혜문학의 특징에 속한다고 이해되기도 한다). 그의 저서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내용은 9세기 이쇼다드(Ishodad)의 증언으로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솔로몬이 파라오의 딸을 옹호하기 위해 아가를 썼다고 보았다. 히브리인들이 파라오의 딸의 외모를 비웃었으므로, 솔로몬은 왕비와 파라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왕비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아가의 자구적 해석을 지지한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가 이러한 내용이 성경에 들어있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 아가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 주의할 부분: 아가를 자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우의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아가의 경전성 문제는 별개이지만 서로 연관된다. 또한 이 문제는 남녀 간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좌우된다.

 

2.4. 자구적 해석에 대한 긍정적 이해

 

자구적 해석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배경은 문예부흥과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서서히 마련되어 갔다.

 

문예부흥 시대의 인본주의는 현세적 실재들이 그 자체로서 가지는 가치를 긍정했다. 연대상으로 보면 15-16세기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신비주의적인 아가 주해의 시대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에라스무스(Erasmus)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이고 자구적인 의미를 주장하면서 아가가 솔로몬과 이집트 공주의 혼인을 기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뒤를 이어 17세기에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는 아가를 헬레니즘 시대의 문학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부각하면서 이 노래가 세속적인 연애시라고 주장했으며, 보쉬에(Bossuet)는 아가를 7일간 계속되는 동방의 혼인 축제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이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이들은 아가가 비록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하지만, 성경에 속해있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에 이르러 헤르더(J.G. von Herder)는 아가가 인간적인 사랑을 고귀하게 기리고 있으며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정당하게 경전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아가의 정경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의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5)

 

이러한 경향은 계몽주의에 의해서도 이어진다. 그런데 계몽주의에서는 인간적 학문의 자율성을 넘어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운 성경 해석을 주장하여 때로는 성경을 다른 역사 문헌들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는 위험을 초래하기도 했다. 종교개혁 또한 성경 본문을 교회 전통으로부터 풀어놓으려 했지만, 초기 종교 개혁자들은 아가에 대한 여러 형태의 우의적 해석6)을 이어갔고 또한 이들은 신앙을 배제한 해석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이후로는, 우의적 해석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주류를 이룬 것은 자구적인 유형의 해석들이었다. 여기에는 다시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예를 들어 아가를 하나의 극(drama)으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주해자로는 야코비(T.C. Jacobi)가 있었다(1772). 이전에 오리게네스나 로우드(Lowth)도 아가가 몇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는 극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으나 이들은 그러한 극이 다른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던 데에 비하여(우의적 해석), 야코비는 아가의 주제가 목동과 양치기 여인의 사랑이라고 보았다. 목동과 결혼한 양치기 여인을 솔로몬이 부귀 영화로 유혹하여 하렘으로 데려가려 하지만, 여인은 끝까지 자기 남편에 대한 사랑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아가를 극으로 보는 해석에는 다른 형태들도 있다.

 

한편 19세기에는 다마스쿠스 주재 프로이센 영사인 베츠슈타인(Wetzstein)이 동방의 혼인 관습을 소개했는데, 몇몇 주해자들은(Budde, Dalman 등) 7일간 열리는 혼인 주간의 관습에서 아가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들을 발견하여 아가가 혼인 예식을 묘사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아가 전체의 구조가 혼인 예식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해도, 남녀를 왕과 왕비로 묘사하는 것이나 아가 4,1-7; 6,4-7 등에서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문학유형 등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또는 아랍의 혼인 관습과 공통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해석은 19세기말 한동안 아가 연구를 주도했다.

 

20세기 전반에는 아가를 메소포타미아에서 주로 이루어진 성혼례 예식과 비교한 경신례적 내지 신화적 해석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메르와 아카드에서는 새해에 부부 신들을 나타내는 여사제와 임금이 풍요를 기원하는 성혼례를 거행했는데, 아가의 본문이 이러한 예식들과 관련된 메소포타미아의 본문들과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주교회의 성서위원회 편찬, 「주석성경」,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0, pp.1847-1848 참조). 아가의 상징적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이 본문들과의 비교가 도움이 되는 경우들은 있지만 이 본문들과 아가의 유사성이 제한적이고 특히 이 본문들이 사랑과 성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은 아가와 매우 차이가 있다.7)

 

그러나 근래에는, 아가와 가장 가까운 병행은 이집트의 문학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위에서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아가 4,1-7 등의 문학 유형을 언급했는데, 시리아와 아랍에는 신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예는 없다. 아가 5,10-16에 나타난 남자 연인에 대한 묘사는, 이집트에서 하던 신상들의 묘사에 더 가깝다. 또한 아가 2,8-17과 5,2-8에 나타나는, 연인의 문밖에서 사랑을 구하는 노래들은 그리스-로마에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이집트에서 먼저 있던 형식이다. 그 외에도 아가의 여러 표현들은 이집트의 사랑 노래들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이렇게 아가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이집트의 노래들은 다른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시들이다. 이러한 병행은 아가의 자구적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3. 아가의 일차적 의미


3.1. 자구적 해석을 위한 근거

 

아가의 본문 자체도 자구적 해석을 지지한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는 아가에서 하느님을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아가가 인간적인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이 논거가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아가 8,6에서 하느님이 언급되는지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채 두더라도, 하느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영적인 영역을 배제한 인간적인 영역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런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의 아가 본문을 읽을 때에 그 안에는 자구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여러 차례 예로 든 아가 1,2,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주었으면!”이라는 구절을, 연인의 입맞춤을 갈망하는 여인의 기원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서 바르비에로는 아가 8,5를, 아가의 본래적 의미가 우의적인 데에 있지 않음을 보이는 증거로 제시한다. 여인이 말하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나는 당신을 깨웠지요”라는 구절을 우의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스라엘이든 개별 영혼이든 어떤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웠다는 의미가 되고, 이어서 나오는 “거기에서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잉태하셨답니다. 거기에서 당신을 낳으신 분이 당신을 잉태하셨답니다” 역시 하느님께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유다교에서 아가의 자구적 해석을 배격한 이유는 인간적 사랑을 기리는 노래가 성경의 전체 맥락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가 아가가 영감받은 책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유 역시, 아가가 남녀 간의 애정을 노래한 책이라고 본 그에게 그러한 내용은 성경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받기에 부적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적 사랑을 기리는 찬가는 구약성경의 전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첫째 진술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세계관과 인간관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하신 세상 안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지 않은”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혼자 있는 것”(창세 2,18)이었다. 혼자 있던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를 만들어 주시자, 인간은 환성을 올린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이것이 구약성경에 따르면 인간의 입에서 나온 최초의 말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라고 말하는 아가가 구약성경의 전통에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창세 1-2장이 구약성경 인간 이해의 전부는 아니다. 창세 1-2장은 3장과 함께 읽을 때에 완성된다. 그러나 자구적으로 읽은 아가의 인간관은 분명 창세 1-2장과 공통되며, 그 내용 때문에 성경에서 배척되어야 할 것은 결코 아니다. 아가는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고, 창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사랑 자체가 신학적 차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4. 본문의 예: 아가 2장; 4장; 8장 6-7절



5. 아가가 말하는 인간적인 사랑

 

아가는 그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들을 지적해 본다.

 

먼저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비하여 아가는 남녀 간의 사랑에서 출산이라는 측면보다 우정, 애정의 차원을 강조한다. 아가 4,8―5,1에서는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이 표현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러한 호칭으로 불리는 여인이 “신부”라는 점은 분명하다. 곧 아가의 남녀 주인공은 실제로 한 쌍의 부부이다. 그러나 이 단락을 제외한 나머지 본문 전체에서 그 남편이 아내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은 “나의 애인(ra‘yātî, 내 친구)”이고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은 “나의 연인(dôdî)”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가에 출산이라는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4,2의 “양 떼”, 6,5의 “염소 떼”, 6,6의 “어미 양 떼”, 7,3에서 사용된 “밀 더미” 등은 다산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은 오직 출산을 위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관심의 초점은 두 연인 사이의 애정에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성혼례와 아가를 비교할 때의 차이점도 여기에서 드러난다. 성혼례에 관한 메소포타미아의 본문들에서 사랑과 성은 풍요다산을 위한 수단이라는 가치를 지니지만, 아가에서 이들은 그 자체로서 기쁨의 원천이고(“오, 사랑, 환희의 여인이여!”, 7,7) 감미로움이며(“당신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달콤하답니다”, 1,2) 감탄의 대상이다(“그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4,10). 이 사랑은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아가는 이러한 사랑 자체를 즐기라고 초대한다(“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 5,1).

 

또한 아가는 사랑이 외부의 어떤 법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사랑 자체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우리 사랑을 방해하지도 깨우지도 말아주오, 그 사랑이 원할 때까지”라는 후렴구이다(2,7; 3,5; 8,4).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멈출 때를 결정할 수 없으며, 사랑 자체가 충족될 때까지 그 사랑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가의 오빠들과 파수꾼들은 사랑에 부과되는 외부적인 법칙들을 나타낸다. 아가에서, 사랑에 대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어머니”와 달리 오빠들은 사랑에 강제적인 규칙을 부여하려 하는 가부장적인 사회 체제를 대변한다. 1,6에서 오빠들은 누이동생이 사랑에 빠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다른 일에 매여있게 하려 하고, 8,8-9에서는 누이동생이 아직 사랑을 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오빠들의 관심사는 훌륭한 구혼자와 결혼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 아가에서 가족이 그 자체로 부정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빠들은 그 부정적인 측면을 나타내기 때문에 - 사랑을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는다. 오빠들은 동생에게 포도밭을 돌보게 했지만 누이동생은 자신의 포도밭을 지키지 않고 사랑을 찾아 나섰고(1,6), 누이의 혼사를 막으려 하는 오빠들에게(8,8-9) 누이동생은 오빠들이 없어도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며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사랑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8,10). 파수꾼들8) 역시 사랑을 찾아 돌아다니는 여인을 막는다.(5,7) 그러나 여인은 밤에 성읍을 돌아다니며 연인을 찾는다.(3,2; 5,7) 밤의 어두움도, 파수꾼들의 난폭한 행위들도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려움보다 강하다.

 

아가에서 사랑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주목할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연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여인에게 연인의 친구들이 “양 떼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양치기들의 천막 곁에서 그대의 새끼 염소들이 풀을 뜯게 하오”라고 대답하는 1,8이다. 위에서 염소는 풍요다산을 상징하는 동물임을 언급했는데, “그대의 새끼 염소들”은 여인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갈망을 나타낸다. 그 갈망을 따라가면 연인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사랑이 인간 자신의 본성에 속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누가 억누른다고 해서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가능성이며, 다만 그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실현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사랑을 사려고 제집의 온 재산을 내놓는다 해도 사람들이 그를 경멸할 뿐이랍니다”(8,7)라는 표현은 아가의 다른 부분들과 달리 비유나 상징이 아닌 명백한 표현으로 이를 밝혀준다. 돈으로 사랑을 살 수 없는 것은 사랑이 자유로운 마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며 강제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대비되는 표현이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8,7)이다. 폭력적인 힘으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불을 끄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사랑이 죽음처럼 강하다는 것은(8,6)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사랑도 물리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아가가 무질서한 사랑에 동조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가에 따르면 무질서한 사랑은 자연스러운 사랑이 아니다. 자연에는 법칙이 있지 않은가? 사랑에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사랑은 자연 질서를, 창조 질서를 따라야 한다. 아가에서는 봄이 사랑의 때라고 말한다.(2,11-13) 자연이 되살아나고 새가 노래하고 꽃이 피는 때가 사랑의 때이다. 겨울에 강제로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사랑은 폭력적으로, 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들에서는 사랑에 대한 아가의 독특한 이해가 나타난다. 그것은 아가가 사랑을 의무라고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이라고 이해한다는 점이다. 사랑은 강요할 수도 없고 억누를 수도 없는 것이다. 때가 되지 않았다면 사랑을 할 수 없다.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7,13) 남녀가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자연의 때가 되었는지 보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남녀가(이 구절에서는 특히 여인이) 사랑을 하기 위한 때가 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아가의 주인공인 여인은 스스로 그때를 기다려야 함을 안다.

 

가족의 긍정적 역할도 이러한 맥락 안에 자리한다. 아가는 사랑을 자연에 속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이 싹트는 장소는 자연 속에서다. 2,10-14에서는 여인을 봄의 들판으로 나오라고 부르고, 8,12-14에서는 여인이 자기 연인을 밖으로 부른다(“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그러나 사랑이 완결되는 것은 “나를 가르치시는 내 어머니의 집”에서다.(8,2) 아가에서 아버지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반면 남녀 모두의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어머니는 다음 세대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역할을 한다. 아가 3,11에서는 솔로몬의 어머니가 솔로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었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밧 세바가 솔로몬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을(1열왕 1장 참조)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혼인날” 그가 사랑으로 꾸며질 수 있게 했음을 의미한다. 사랑은 자연에 속한 것이면서, 혼인과 가정이라는 제도 안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아가는 사랑을 위하여 간직한 정결의 가치도 알고 있다. “그대는 닫힌 정원, 봉해진 우물”(4,12)이라는 표현과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 온 것이랍니다”(7,14)라는 여인의 말은, 여인이 한 사람의 연인에게만 사랑을 허락했음을 말해준다. 또한 누이동생의 사랑을 가로막으려 하는 오빠들에게 동생이 “나는 성벽”(8,10)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지킬 줄 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빠들이 가로막는 것을 물리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제재를 가할 필요가 없이 여인 스스로 사랑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윗 단락에서 말한 “사랑의 때가 된다”는 것은 여인 스스로 그러한 성숙성에 도달했음을 전제한다. 만일 여인 스스로가 그러한 질서를 유지할 줄을 모른다면 실제로 오빠들의 통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 아가의 여인은 어떤 경우에 사랑의 가능성을 실현하는가? 아가의 여인이 보여주는 매우 현대적인 면모는 그 여인이 지닌 뚜렷한 자존감이다. 필자는 아가의 사랑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그 자존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가의 여인이 오빠들의 통제를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사랑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가치를, 자신이 줄 수 있는 사랑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재산으로 사랑을 사려고 하는 이들을 경멸한다.(8,7) 아가의 여인은 방비된 도성과 같다(“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까지 자아낸다오”, 6,4; “그대의 코는 다마스쿠스 쪽을 살피는 레바논 탑과 같구려”, 7,5 등). 그녀는 “달처럼 아름다우며 해처럼 빛난다”고 일컬어지지만, 동시에 “기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을 자아내는 여인”(6,10)이고, 연인까지도 그 사랑을 두려워하여 “내게서 당신의 눈을 돌려주오”(6,5)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아가가 인간의 본성인 사랑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인을 쉽게 정복할 수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아가에서, 그 여인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은 연인의 사랑뿐이다(“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이랍니다”, 2,4). “나는 성벽, 내 가슴은 탑과 같아요. 하지만 그이 앞에서는 화평을 청하는 여자랍니다”(8,10)라는 표현은 특히 의미가 깊다. 성벽과 탑은 방어시설이다. 앞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여인이 사랑을 구하는 이들에게 쉽게 사랑을 허락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런데 오직 “그이 앞에서” 그녀는 화평을 청한다.9)

 

아가의 여인이 사랑에 정복되는 과정에서는 연인의 “경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가 전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의견을 정설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아가 안에서는 남녀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찬가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의 단락 구분과 소제목을 따른다면, 아가 4,1-7.9-11에 “신부에 대한 찬가”가 있고, 아가 5,10-16에는 그 신부가 “나의 연인”을 묘사한 노래가 있다. 신랑은 6,4-7에서 “그대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7,2-10에서 다시 “아름다운 애인”을 묘사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노래가 셋, 그리고 신부가 신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노래가 하나다.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 나의 애인이여”(1,15; 4,1), “정녕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의 연인이여”(1,16)로 요약되는 이 노래들은 남녀가 서로의 가치를 알아봄을 드러내며, 남녀가 서로를 찾지만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한 다음에 자리하면서 그들의 만남을 준비한다.10 연인들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남녀 모두가 실패를 겪는다. 여인의 창문 밖에서 여인을 불러도 여인은 밖으로 나오지 않고(2,8-14),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한”(3,1) 여인은 밤에 성읍을 돌아다니며 연인을 찾아야 한다. 5장에서는 그들 남녀 모두가 겪는 실패가 표현된다. 여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르지만(5,2) 여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얼마 후에 문을 열어주었을 때에는 이미 연인은 떠나고 없다(5,6). 남녀 모두, 일방적으로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겪은 다음 비로소 연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경탄할 수 있게 되고, 그러한 경탄을 통하여 서로의 가치를 알아보고 존중하는 가운데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것이 된다.

 

아가는 사랑을 긍정한다. 사랑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밤의 공포에 대비하여”, 3,8).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을 악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나는 내 연인의 것, 그이는 나를 원한답니다”(7,11)라고 말할 때에도 거기에는 탐욕에 대한 경계가 없다. 아가에 나타난 남녀의 관계는 흠이 없는 것,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측면 때문에 아가의 사랑은 낙원적이라고 일컬어지고, 여러 저자들은(Barth, Lys, Landy 등) 아가를 창세 2장과 비교한다. 서로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경탄하는 아가와 가장 가까운 성경 본문은 창세 2,23의 환호성이다. 알몸인 것을 알고 두려워하며 몸을 가리려 한 창세 3장의 부부와는 달리, 이들은 알몸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창세 2,25)11)

 

사랑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구약성경의 전통에 기초한다. 아가가 사랑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창조의 선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고, 창조의 선성은 구약성경의 세계관의 바탕이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12) 원칙적으로 여기에는 인간의 성도 포함된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면(창세 1,26),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사랑을 보며 하느님을 기릴 수 없는가? 인간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뵈올 수 없는가? 창세 2장의 맥락 안에서 성은 하느님의 선한 창조물로 여겨진다. 메소포타미아의 성혼례 전통에서와 달리 남녀의 결합은 신들의 결합을 모방하는 것이나 풍요를 기원하는 예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고 여기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마련해 주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인 이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모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에 대해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 이성 등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창세기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첫 모습, 죄로 남녀의 관계가 손상되고 인간의 본성도 상처를 입기 이전의 인간 모습이 아가에 그려져 있다. 이것이 현실적이라기보다 이상적인 모습이고, 인간 모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아가를 읽으면서도 잊지 말아야 할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창세 1-2장은 창세 3장과 함께 읽어야 하고, 인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인간의 나약함과 비참함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아가가 말하는 사랑에 관한 본고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그 사랑의 특징들과 더불어 반드시 짚어두어야 할 것은 현실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인간, 우리가 만나는 남녀의 관계가 창조된 그대로의 상태는 아니라는 진실이다. 그러나 아가가 창조의 선성에 대한 믿음을 보존하는 것은 - 창세기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 그 창조가 손상되었음을 몰라서가 아니다. 죄로 손상된 이 세상을 보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기에, 눈앞에 보이는 죄악보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부여하신 선성이 더 강하다고 믿기에 사랑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모험을 보여준다. 창세 3장을 이미 알고 있는 저자가 창세 1장을 그 앞에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아가의 저자도 쉽게 죄로 떨어질 수 있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간직하는 것이다.

 

 

6. 아가의 여러 의미들의 관계

 

아가의 해석사를 통하여 아가의 본래적인 의미가 인간적 사랑을 노래하는 데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가를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인간 영혼의 사랑에 적용하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본문과 동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일차적 의미와 전이된 의미는 구별되고,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노래하는 것이 아가의 일차적 의미는 아니다. 그 본래적 의미를 배제하고 아가를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비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하느님의 충실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독자는 인간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아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머피는, 히폴리토나 오리게네스와 같은 이들의 우의적인 아가 해석이 임의적이고 본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이라거나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적절치 못한 주제를 회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 보는 견해들을 반박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우의적 해석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한 사목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이 성경의 단일성을 바탕으로 하여 구약을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임을 강조한다. 구약이 신약에서 완성된다면,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된다면,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우의적 해석을 통하여 아가가 지니게 된 의미는 비록 전이된 의미에서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가를 전이된 의미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인간적 사랑 자체가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비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가의 해석이 자구적 의미 쪽으로 기울게 되면서 때로는 인간적인 사랑이, 그리고 아가가 지닌 신학적 차원이 잊힐 수도 있었다.13 실상 아가에서 하느님은 전면에 언급되지 않는다.14 그러나 아가를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읽을 때에는 그 안에 담겨있는 신학적 차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아가와 성경의 다른 본문들 사이의 연관을 파악하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적 사랑 사이에 분명 어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라면, 아가를 전이된 의미로 읽는 것은 그러한 예언자들이 사용한 비유와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앞서 유다교의 우의적 해석을 마무리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가가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본 유다교의 해석은 예언자들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호세아에서 비롯되는 이 전통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것이 되고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는 계약 관계를(탈출 19,5-6 참조) 부부 관계의 표상을 통하여 나타내었다. 실상,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정식으로 요약되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는 바로 아가에서 ‘나의 연인은 나의 것, 나는 그이의 것’(아가 2,16; 6,3; 7,11)이라는 후렴구로 표현되는 부부 관계에 비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혼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혼인의 비유로 나타내는 것 또한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이러한 표상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영혼과 그리스도의 관계와 부부 관계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그러한 전통을 역방향으로 적용하여, 아가가 노래하는 남녀 간의 사랑을 신적인 사랑을 그려 보이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아가가 남녀 간의 사랑이 그 자체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생겨나거나 저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자연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 스스로의 가치를 알고 있기에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사랑에 의하여 얻어질 뿐 다른 가치들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위험을 내포하는 두려운 것으로서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창조의 선성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유일한 상대방에 대한 전적이고 흠 없는 충실한 사랑을 기린다면,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은 신적인 사랑에서 더욱 완전하게 실현되는 특성들이다. 인간적 사랑은 그 자체의 가치를 온전히 간직하면서 하느님 사랑의 이러한 모습들을 드러내는 비유가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서로 사랑하자고 권고하면서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1요한 4,7)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사랑이 현실적으로 지닌 모든 한계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가치를 믿는 것은 그 사랑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주신 당신의 모상에 속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사랑은 하느님의 선한 피조물인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아가 본문을 읽을 때 찾아낼 수 있는 여러 층의 의미들이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할 때, 아가의 본문은 우리에게 인간적 사랑의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동시에 그 사랑이 나타내 보이는 신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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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문헌: 피에르 그럴로, 「타르굼」, 이기락 옮김, 가톨릭출판사 ; 바르비에로, G., 「아가. 새로운 번역, 입문과 주석」, 안소근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4|베르나르도, “성 베르나르도의 아가에 대한 강론”, 안응렬 옮김, 「가톨릭다이제스트」(1999년 11월-2001년 4월호) ; 안소근, 「아름다운 노래, 아가」, 성서와 함께, 2013 ; 십자가의 요한, 「영가」, 방효익 옮김, 기쁜소식, 2009  G. Barbiero, Song of Songs (VT.S144), Lieden - Boston, 2011 ; M.E. Murphy, The Song of Songs (Hermeneia), Minneapolis, 1990 ; M.H. Pope, Song of Songs (Anchor Bible 7C), Garden City, 1977.

 

2. 이와 관련하여 Barbiero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해 둘 것은 아키바가 그의 신앙을 위하여 순교자로 죽었으며 그의 생명을 희생으로 바침으로써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라는 아가 8,6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3. 타르굼의 아가 해석 참고: 피에르 그럴로, 타르굼, 이기락 옮김 (가톨릭출판사, 1998), pp.178-182 참조.

 

4. 성 베르나르도의 아가에 대한 강론 참고: 가톨릭 다이제스트 2000년 1-2월, “성 베르나르도의 아가에 대한 강론”, 안응렬 역  십자가의 요한, 「영가」 (방효익 역).

 

5. “18세기에는 신심 깊고 재능이 뛰어난 독일 시인이며 비평가 헤르더에 의하여 아가의 우의적이고 신비적인 해석이 심각하게 흔들렸다. 그는 히브리 시문학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문학적 아름다움을 애호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다. 헤르더(1778)는 아가 안에서 명백한 의미, 곧 자구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우의적인 해석을 하는 이들이 상식을 어기며 문학적 및 언어적 분석을 위한 규칙들을 만들어 내었다고 고발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아가는 참되고 정결한 사랑의 여러 단계들이며 이 책이 성경에 들어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아름다움과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헤르더는 이 시 전체가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랑이 시작에서부터 성숙해 가는 것을, 그리고 그 열매를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이 단일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고는 보지 않았고 개별적인 노래들의 모음이라고 보았다.”(Pope, 131)

 

6. 개신교의 우의적 해석의 예(Brightman).

1,1-4,6 다윗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4,7-8,14 교회의 역사.

5,8 개신교의 시작. 모여든 이들은 1160년에 연인을 찾았던 Peter Waldo.

5,9-10 인노첸시오 3세의 반 그리스도교적 무리에 맞선 알비파의 전투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

5,12-17 여러 사람들의 가르침에 연결지음(예를 들어 John Wicliffe, John Huss 등)

6-8장 루터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복구된 교회.

 

7. 수메르의 성혼례와 산/저승 신화에 대해: 「성서와 함께」(1997. 2), 65-72쪽 참조.

 

8. 아가에 등장하는 파수꾼들은 헬레니즘 시대의 제도로서,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이 아가의 주인공을 때리고 옷을 빼앗은 것은 밤중에 돌아다니는 그녀를 창녀라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9. “화평을 청하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어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화평을 청하는/항복하는” 또는 “발견한”으로 해석할 수 있고, 숙어적으로 “호의를 입은”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이든 앞 구절에서 묘사하던 방비는 무너진 상태다.

 

10.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노래들은 아랍의 문학 양식인 와스프(wasf)의 예들이다. 그러나 아랍에는 신랑을 묘사하는 노래는 없다. 이집트의 경우 군주의 모습을 그리는 작품들이 있는데, 아가 5,10-16의 경우 이들과 병행점을 찾아볼 수 있다.

 

11. 아가 7,2-10에서 여인은 둥근 허벅지, 배꼽, 젖가슴을 보이며 춤을 추고 있다.

 

12. 아가보다 후대의 본문인 지혜 11,24도 인용하고 싶다.

 

13. 아가의 심리학적 분석이나(Krinetzki) 아가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를 배경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에서(Keel) 이러한 위험성이 나타나기도 했다.

 

14. 아가 8,6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회지 하나되어 42호(2016년, 성바오로딸수도회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발행), 안소근 실비아 수녀(성 도미니코 선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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